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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조선 근대화 막은 위안스카이, 멋대로 임금 폐위 도모하기도

1882년 6월 임오군란을 기화로 3000명의 중국군이 들어왔다.

중국의 간섭을 주권 침해라고 생각한 개화파 인사들은 1884년 청불전쟁이 일어나 중국군의 절반이 월남(베트남)으로 급파되기에 이르자 일본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켜 중국을 내몰려 했다. 그때 25살의 풋내기 장교 위안스카이(1859~1916)는 이들의 세상을 '3일 천하'로 만들어 버렸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밀려날 때까지 그는 국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면서 조선을 실질적으로 중국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무능한 왕을 신속히 폐하고 이씨 중 현명한 사람을 골라 새 왕으로 옹립해야 한다."

심지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중국을 막으려 한 인아거청책을 펼친 고종을 어리석은 임금으로 몰아 폐위하려 할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청일전쟁으로 중국으로 쫓겨 간 후 패배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난 변법자강운동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는 우리의 근대화 노력도 철두철미 가로막았다. '태평십년(1885~1894)' 동안 우리에게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은 물론 세상을 알기 위한 교육의 기회마저 주려 하지 않았다. 청일전쟁 직후 윤치호가 "나는 조선에 대한 중국의 극악무도함을 너무도 증오하므로 다른 나라의 지배는 나에게는 비교적 견딜 만하다"고 일기에 적을 정도로 핍박은 심했다.

중국은 일본이 대륙침략에 나선 뒤 고통을 절감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일본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던 중국은 조선이란 방패를 잃은 아픔을 뼛속 깊숙이 새겼다.

3대째 권력 세습을 이야기하는 북한왕조에 또 하나의 임오군란이 터지길 중국은 바랄지도 모른다. 과거를 들여다보다 보면 세기를 훌쩍 건너뛰어 지금 여기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진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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