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가작 "상실과 실어를 치유하는 글쓰기-한혜영론"
이권재
이러한 견해는 언어가 감정을 표현하는 음성적인 몸짓(vocal gesture) 같은 하위 단계에서 사고를 표현하는 명료한 음절의 상위단계로 진화되어 가는 일련의 과정을 겪었다고 주장한 칼 포퍼(karl popper)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언어 습득의 과정을 경험의 축적으로 이해하든 혹은 진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든지 분명한 것은 긴 시간과 지난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미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의 언어를 습득한 그래서 한 언어에 대한 직관이 이미 완성되었거나 혹은 상위단계로의 진화를 경험한 성인에게 새로운 언어는 어떤 의미인가 하는 물음이 발생한다.
더욱이 한 두주의 출장이나 여행이 아닌 송두리째 삶의 자리를 바꿔야 하는 이민의 삶에서는 어떤 작용을 하게 되는 걸까를 고민해야 한다.
새롭게 대면한 언어에 대해서는 그렇다 치고 이미 학습되어지고 축적되어진 언어에 대한 사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만 한다.
새로운 땅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미 모국어는 또 다른 외국어가 되어 버린 상황에서 습득된 자신의 언어는 더욱더 고립되고 퇴화될 수 밖에 없다.
그런 환경 속에서 모국어로 글을 쓰는 창작의 활동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고통 이상의 것이다.
창작의 고통을 넘어선 실존의 고통을 수반한다. 퇴화와 투쟁하는 멀어져 가는 언어의 감각을 살리기 위해 무감각한 심장을 찌르는 자학의 산물이 이민 문학의 주소이다.
이민을 결정하고 익숙했던 삶의 자리를 떠나온 사람들에게 있어 언어는 지독한 실존의 문제이다.
한혜영은 시속에서 영어 습득의 과정을 좀처럼 거품이 일지 않는 질 나쁜 가루비누 같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정작 제한된 공간의 서문에선 고백한 이국 땅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는 건 사막을 헤매는 전갈만큼이나 외로운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그 외로운 작업을 그치지 못하게 하는 힘을 아무도 자기를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라고 정의한다.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기 원하는 대상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시인은 이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끊임없는 '기억해내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해 내기 속에 등장하는 그 주인공들에게 여전히 자신도 기억되기 원하는 내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낯선 이국 땅에서 상실의 두려움에 떨며 원거리의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시인의 글쓰기를 단순한 '추억해내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고통의 질적 가치를 저하하는 표현이 되고 만다.
1. 실어-일정한 거리 제한
두 권의 시집에 수록된 130편에 달하는 시의 배경은 90%가 한국이거나 혹은 모호하다.
정작 90년 이후에 작가의 삶의 자리가 되고 지독한 언어의 재습득 과정이 되었던 미국 땅에서 얻어지는 소재들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나마 이국적인 배경이 분명한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는 뉴욕에 머물고 있는 동생을 소재로 하고 있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플로리다 '아득한 횃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주소는 넓은 미국 땅 전체에서 한 치도 줄여질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지 않는다. 그나마 '뜨거운 상상' 속에서 겨우 부끄러운 새색시처럼 살림을 차렸다고 고백한 곳이 시인이 현재 머물고 있는 플로리다이다.
시의 소재 속에 현재의 시간들이나 시선에 들어오는 배경들이 지독하게 결핍되어 있는 이유를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혜영의 시작이 '기억해내기'에 초점이 맞춰진 이유도 있겠지만 작가 스스로의 의도된 절제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녀의 글쓰기는 철저하게 잊혀짐에 대한 방어 체계 구축에 집중되어 있다. 이 방어체계는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위한 몸부림과 동시에 새로운 삶의 자리에서 다시 축적되어 하나의 문법 체계를 이루어 가는 또 다른 언어들에 대해서도 지극히 경계적이다.
이미 일상의 언어들이 되어 단순히 외래어라고 부르기엔 너무 익숙해져 버린 수없이 많은 단어들에 대한 경계가 그렇다.
결국 모국어에 대한 처절한 실어의 경험은
작가를 철저히 외로운 곳으로 몰아넣는다
조금만 경계를 늦춰도 쉽게 튀어 나오는 '오래 묵은 악기'에 등장하는 '포크를 잡은 손가락' 이나 '만루 홈런'에 등장하는 '옆집 펜스' 같은 표현들을 작가는 퇴고의 과정에서 수없이 많이 지웠을 것이다. 한국에서 글을 쓰고 있다면 이국적인 느낌이나 표현의 생경함을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했을 단어들마저도 지극히 빈도수를 제한한다.
나 그리고 40년 전의 미친 바람을 기억하게 하는 소재로 '팜트리'를 등장시키는 시적 소재에게 마저 희귀성을 부여한다.
타인들에겐 풍성한 소재의 확장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이런 수없이 많은 단어에 대한 고집은 자신의 글쓰기를 한국문학의 큰 테두리 속에 두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지 표현이기도 하다.
굳이 선을 그어 이민문학의 영역으로 내몰리고 싶지 않은 시적 의지이다. 시가 거기서 시작되었고 거기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 내어 시를 쓰고 있다는 무언의 항변이다.
하지만 궁궐처럼 부산하게 언어들이 살아 숨 쉬는 한국을 떠나와서 여전히 모국어를 붙잡고 글을 쓰는 작가에게 가장 큰 곤욕은 익숙한 다른 언어들에 대체되어 하나 둘씩 감을 잃어가는 어휘에 대한 상실의 경험이다.
그것은 게으른 언어 훈련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미 하위 단계의 음성적인 기호들을 넘어서 사고를 전달하는 체계로 사용되어지는 상위 단계에 접어든 또 다른 언어의 진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늙은 장수 말(言)을 타고
협곡을 건너 대화강으로 가는
도중 말을 잃어버립니다
눈 깜빡할 사이
말(言)을 낚아채어다가
뼈도 살도 없이 감쪽같이
먹어 치우고 시치미를 뚝
따고 있는 이놈의 협곡서 장수
말을 잃는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중략>
오늘도 말(言)을 잃어버리고
허둥지둥 늙은 장수는
그 사이 잊어먹다니 그사이………
낭패할 새도 없이
아무 말이나 붙들어서 타고 일단은
대화강 기슭을 도망쳐 나옵니다
-'눈 깜빡할 사이' 부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라 자부했던 모국어의 단련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대화강이란 장소에서 작가는 충격적인 실어의 경험을 하게 된다.
낭패할 새도 없이 아무 말이나 붙들고 도망쳐 나오지만 결국 이 처절한 실어의 경험은 새로운 문화와 언어에 대한 대면마찰을 극복하지 못하고 작가를 철저히 외로운 곳으로 몰아넣는다.
작가는 거기서도 언어를 포기하지 못하고 혼잣말을 시작한다.
이 나이에 벌써 혼잣말이
늘어간다 무슨 말인가
중얼중얼 이방의 언어처럼
어색하고 낯선 이말/
-'혼잣말이 두렵다' 부분
충격적인 실어의 경험도 시인의 글쓰기를 향한 열정들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창작의 열정에 비례한 작업이 아니라 존재의 실존의 욕망에 의한 생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비록 누구도 듣지 않고 설혹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시인의 중얼거림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감각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사람에겐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 그 작업의 연장을 통해 시인은 새로운 시를 만들어 낸다. 정제된 언어인 시의 언어는 나무와 강물과도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경지는 쉽게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외로움 속에서도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인가에게 말걸기를 포기 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외로우니까 닭을 키우고 외로우니까 닭에게 말을 걸고 외로우니까 비로소 닭의 말이 해독된다 닭장에서
닭장에서 닭장에서 ------ 외로우니까 내가 보이고 외로우니까 나에게 말을 걸고 외로우니까 내가 비로서 해독된다.
과거 나는 공작이었다 짤랑 짤랑 수많은 인연의 장식들이 싱싱한 정오의 햇살을 받아 빛나던 시절 보여주면 볼 뿐 볼 필요라고는 전혀 없던 눈먼 공작의 한때였다.
수백개 황금 눈동자를 품으면 품는 대로 부화했던가. 깃털처럼 믿을 게 못되는 인연 그리고 세월이여 화려하던 꼬리 우수수 낙엽이 쏟아지고 문득 꾹꾹꾹꾹 닭소리를 내는 의심스런 모가지를 사정없이 비틀자 잠시 공작으로 오독되었던 닭은 결국 닭으로 판명되고 생목숨을 노리는 소리매 한 마리 허공 중에 까맣다.
-'말 걸기' 부분
시인의 새로운 언어에 대한 해독은 닭장 속에서 이루어진다. 외로움에 대한 갈등과 소통의 단절은 얼마든지 그 자리를 접고 떠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자신이 머물 곳이 처음부터 여기가 아니었고 스스로도 닭이 아닌 공작이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닭장 앞을 떠나지 않는다. 끊임없는 말걸기를 시도하고 비로서 닭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 소통법을 통해 정작 스스로를 해독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그리고 한때 스스로를 오독했던 방식에 대한 회의를 품는다. 이 베이컨 식의 회의를 통해 작가는 비로서 스스로가 단절시켰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쉽게 어제를 버렸다
매일 소멸되는 소량의 피처럼
가볍게 써버리는 동전처럼
버리고 돌아서며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
남겨진 것 중에
몸이 성한 것들은 서둘러
동굴을 빠져나가고
불구의 추억만 남아 낡고
초라한 어둠을 지키는 일
일단 버린 것들은 버린 것이다
저마다 잊힐 만큼은 잊혀져서야
비로서 어제가 되었으므로
〈중략>
나는 무엇을 버릴 수 있다고 믿었을까
무엇을
과거는 아무 것도 흘러가는 물이 되지 않았다
어느 한순간에 울컥 되돌아오는 과거는
역류의 기회만을 엿보며
침체된 내 영혼의 하수구 속에서
다만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과거는 아무것도 흘러가는 물이 되지 않는다'
말걸기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발견했던 시인이 시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또하나의 발견을 경험한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초 시계의 기능과는 다른 시간이 때를 기다리면서 침체된 하수구속에 숨어 있었다는 걸 발견한 시인의 각성은 비로소 스스로 묵살해버린 어제가 오래된 추억들과 해후하는 다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어제와의 진정한 화해를 통해 시인은 실어의 충격을 극복해 간다. 시인은 다시는 그 시간을 부화시켜 날개를 달고 날아가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시인이 감정의 체온을 허락하지 않고 품어왔던 알들이 아직도 시인에게 가득하다.
그 알들을 향해 겉옷을 벗고 체온을 나누어 품은 작업이 시를 쓰는 작업이다. 꽁꽁 얼려 사장시킨 기억을 끄집어 내어 부화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스스로 두었던 거리제한에 대한 해제이다.
2. 방생-기억으로의 회귀
대체로 한국어로 지어진 이름들은 영어로 발음하기가 어렵다. 발음이 어려운 단어를 기억하기가 어렵듯이 어려운 이름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미국식 이름에 대한 무언의 압력을 받는다.
처음엔 그 이름으로 자기를 불러도 쉽게 반응하거나 뒤돌아 서지지 않던 이름이 점점 익숙해져 가면 본명은 먼지가 쌓여 간다.
하지만 추억의 통장은 영어 이름이나 가명으로 개설되지 않는다. 과거와의 단절을 결정했던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버리고 떠나온 사람들이다. 이름 석자가 깊숙이 파인 도장은 작은 부피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이민 가방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도장으로 열람이 가능한 통장에 가득한 추억의 부피를 쉽게 간과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통장을 개설하려고 십 년만에 목도장 하나를 팠어 한.혜.영. 서서히 살아나는 글자를 지켜보다가 울컥 서러웠어.
그 동안 어디를 헤맨 것이냐 도장을 판 이가 나를 건네주었을 때 눅눅한 알몸에서 곰팡내가 훅 하고 끼쳐왔어 어쨌거나 맴 먼저 했던 일은 추억을 찾는 일이 었어 차압당한 시간 차압당한 거리 차압당한 젊음이 찰랑찰랑 긴 머릴 나부끼며 돌아괴 시작했어.
논현동 하늘에 노랗게 쏟아지던 은행잎이며 어쩌다 들어온 햇살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던 반지하 셋방 는개 뿌옇게 내리는 산자락에 어머니가 안방으로 돌아오고 팔십년대 말 추적추적 비에 젖으며 저만큼 멀어져가던것들 모두가 돌아왔지 그랬어 그저 추억의 끝자락마다 도장만 누르면 되었던 거야 내 눈물 내 붉은 심장의 피를 듬뿍듬뿍 묻혀서는 꾹꾹…/(이하 생략)
-'추억의 잔고 중에서' 부분
작은 목도장 하나에 새겨진 이름이 미이라처럼 사장된 추억에 혈관을 펌프질하자 추억이 생기를 얻게 된다. 어떤 기억이라도 모조리 살아난다. 어떤 기억이라도 생기를 갖고 색상을 갖는다.
하지만 시인의 분명이 이 잔고 중에 다른 것들이 남아 있음을 제목에서 암시한다. 이번에는 이름이 새겨진 목도장만으론 힘에 부쳐 큰 '작정'을 해야만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기억을 향한 방생은 가속도를 잃지 않는다.
한 사람의 절망이 그처럼 쉽게 막을 내리는 무대는
처음이었네 흥행에 실패한 악극단 단장처럼
지린내 풍기는 천막 사이로 멀어져갔던 아버지
그 날 이후 어린 단장이었던
나 오늘은
그 분을 불러 공연을 부탁할 작정이네
번번이 실패했던 간판 서둘러 바꿔버리고
깊이 잠들었던 그 날의 징소리 화들짝
깨워볼 작정이네
아버지-이 아버지-이
사십 년 세월이 징징 목을 놓자
일곱 살에서 딱 멈춰버렸던 동생의
빨간 자전거 다시 굴러가고
상복 입은 채 철없이 고무줄 뛰던
딸년의 마당으로 아버지
절름절름 발 다쳐 돌아오시네
아 이처럼 완벽한 그리움이라니
진작에 아버질 무대에 올려야 했네
삶은 늘 밑지거나 본전이지만
그리움은 언제든 이렇게 남는 장사인 것을
벌써 암표 장수까지 얼씬거리는 술잔 속
아버지의 죽음은 영원한 성공이었네
작은 목도장 하나에 새겨진 이름이
추억의 통장처럼 기억을 되살려낸다
-'그날 이후' 전문
아버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가계도엔 복잡한 사건들이 연루되어 있다. 시간과 관계의 단서들이 비교적 직설적으로 노출된 이 작품 속의 아버지의 기억해내기의 소재를 넘어서 부활시키기의 단계까지 진행된다. 기억의 생명력이 작은 목도장에서 시작되었다면 아버지를 부활시키기 위해 그녀의 어린 단장의 모든 경험을 모아 무대를 만들었다.
아버지의 흥행에 실패한 아버지의 앵콜 무대엔 많은 사람들이 초대되지 못했다.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성장이 멈춰버린 동생과 자신만이 앉아 절망의 막이 내렸던 아버지의 무대를 다시 올렸다.
단 일회의 공연으로 충분히 이윤을 남긴 시인은 얼씬 거리는 암표장수들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마지막 성공의 무대를 끝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방생한다.
시인의 그 일회적인 방생으로 수없이 많은 기억들과 조우한다. '비겁한 소방관'에선 병으로 떠난 언니를 '아직은 알 수 없으리'에선 조카가 등장한다. 작가 스스로가 가두어 두었던 공간속에서의 진정한 탈출과 탈피가 가능해졌다.
시간의 제약도 없어졌다. 60년대의 기억도 자유롭다. 누구든지 끄집어내도 기억은 사용료를 내지 않고 '날마다 이자가 붙어 잔고'가 늘어간다.
3. 상실-치유의 글쓰기
스피노자의 신체이론에 따르면 인간 정신은 자기 신체 변용의 관념에 의해서만 외부물체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내부적인 소멸은 신체 보존의 욕망에 반하고 소멸의 경험은 모든 인식의 방법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하여 신체적인 이 소멸의 경험은 죽음에 대한 직관을 향상시키며 이 직관을 넘어선 체험이 비로소 영원으로 통하는 문을 발견하게 하는 힘이 된다.
과거와의 화해를 이루어 가고 있는 시인에게 갑자기 찾아온 여성으로서의 신체적인 변화가 시인의 글쓰기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사건이 시인의 죽음에 대한 자세를 바꾸는 결정적인 시간이 된다.
여자의 궁전을 찬찬히 둘러본 하얀 가운이
말합니다 무덤이 거의 완성되었군요 칠성판을
준비하는 검은 손가락들 부쩍 소란해졌습니다
아직은 할 일이 남아 있어요 제발
추억이라도 몇 조각 내벽에…
거의 죽은 여자가 창백한 입술을 달싹거립니다
-'어떤 대화'부분
내적 죽음의 각성이 현실에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능케 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상실의 의미들을 치유하기 위한 공감이 시작된다.
'뱀 잡는 여자'의 화자는 이 죽음의 사건에 있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등장한다.
죽음의 공간에 가해자로 나서는 경험을 통해 발견한 두려움이 결국은 스스로의 신체의 변화를 인정하고 딛고 서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이 죽음의 본질에 더욱 가까워지는 이 경험을 통해 죽음에 대한 시선들이 확장된다.
생리적 현상으로 이분화 된 여자의 생은 삶과 죽음의 현상으로 연장되고 이 과정에 대한 자기 성찰이 타인의 죽음의 문제에 대한 공감을 가능케 한다.
돌이켜보면 추웠던 그때 그 시절
햇살이 있어 살아남았습니다
점심 굶는 아이들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학교 담벼락
새 모이처럼 흩뿌려지던 햇살만
주워 먹고도 나 여기까지 당도했는데
꿈도 희망도 없어 지지리도 가난한
요즘 사람들은 정부보조금처럼
죽지 않은 만큼 배달되는 햇살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썩어 뚝뚝 떨어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완벽하게 잘 썩어버린
하늘 한 조각을 잡고 어떤 어미가
셋이나 되는 애들들 데리고 끄덕끄덕
세상 바다를 건너갔다는 나쁜 소식
잘 도착했을까 추울 텐데 그곳엔
학교 담벼락 같은 건 하나도 없을 텐데
나 종일토록
그들이 건너간 죽음의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나쁜 소식' 전문
죽음에 대한 고찰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인의 글쓰기는 내적 상실과 실어의 모든 사건들을 향한 치유의 과정을 모색한다. 시인은 이 과정을 통해 생산된 시를 따뜻한 온천수에서 피부병 환자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닥터 피쉬와 같다고 정의한다.
이민의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수없이 많은 상처와 아픔들을 향해 달려가는 시인의 태도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상처로 인해 일어난 각질은 원래 피부의 일부였다. 기억도 그렇고 시도 그렇다. 언제나 삶의 일부다.
그것은 이민의 경험을 통해 삶의 자리가 변해서 유목민처럼 떠돌아야 하는 환경 속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그러하기에 한혜영의 글쓰기는 상실과 실어의 치유를 위한 글쓰기를 넘어서려 한다.
이제 더 이상 추억의 옛집에 방문하는 일에 머무르지 말고 날개 지치도록 날아서 지구 전체에 다다르는 글쓰기가 되려고 한다.
〈끝>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