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신인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작 "귀향기"
박은아
“닥터 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 자가 다시 다시 영주권 신청을 한 것은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나는 이 물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한 물음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저도 변명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살다보면 나오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니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누구나, 당신이라도 그 상황에서 저가 택한 선택을 했으리란 것이지요.”
“글쎄요. 저 같으면 미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어머니를 보살피는 길을 찾았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다던가…. 미국 국적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이유는 변명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가 한국의 상황, 양로원을 알 리가 없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이렇게 그의 면접, 아니 질문을 이어갔다.
“저는 닥터 김이 미국적을 포기한 이유에서 상당이 반미적인 언어를 구사했고 그 언어들은 미국적을 획득했었을 적에 행한 선서의 내용과 상당히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저가 쓴 국적 포기서를 읽어보셨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한국의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미국 대학생들을 가르칠 때와 다른 기쁨을 갖게된 것도 사실이고, 미국이라는 동굴의 끝까지 가본 사람으로 미국에 더 미련이 없다고 썼었지요.”나는 거기서 호흡을 가다듬고나서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저가 처음 쓴 다른 국적 포기서도 읽으셨겠군요.”
그는 서류를 뒤지면서 다른 국적 포기 사유서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건 이상한데요. 1차 국적 포기서가 거부되었기 때문에 2차 국적 포기서를 쓴 것입니다. 2차 국적 포기서만 읽으셨으면 저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내 말을 거기서 차단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직 하나의 사유서를 읽었을 뿐입니다. 유감입니다.”
그는 내가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 들으십시요. 저는 1차 국적 포기 사유서에서 정직하게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서 서울의 대학으로 옮겨왔고, 그 대학에서 한국 국적으로 돌아와야 교수직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미 국적을 안타깝게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썼었어요.”
“그런데요?”
“서울의 미국 대사관은 저의 정직한 사유서를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강압이나 강제에 의한 미국적 포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요?”
“서울의 대학 행정가는 어찌 되었던 미국적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그도 감사에 걸려 파면당할 것이라고. 그 말을 듣고 국적 포기 사유서를 소설처럼 써내려갔지요. 정직한 사유서가 거부되었으니 정직하지 않은 사유서가 나올 수 밖에 없었지요.”
그는 내 말을 처음으로 심각하게 듣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이 세상에 정부 관리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인생살이가 어딘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이민국 사무실을 빠저 나왔다.
그는 9·11 사건후 신원조사가 오래 걸린다는 말을 내 뒤통수에 던지고 있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밖에 나오니 겨울바람이 차다.
2
7년마다 얻을 수 있는 안식년에 서울의 대학으로 가 1년 가르치고 오면 그동안 쌓인 죄의식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래서 여기 저기 한국의 대학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1년기간의 방문교수던, 초빙교수던 “줄이 닿지 않으면” 모든 것이 아직도 어려웠다. “가능한 것도, 불가능한 것도 없다는 한국”이라고 한 후배는 말하며 가능한 쪽으로 희망을 가지라고 격려했다. 그래서 미국 우주항공국에 가서 1년 연구교수로 갈 준비도 했다.
과학 기술 정책이 나의 전공분야이어서 지금까지 미국 우주항공국, 미국 국립보건연구원에서 80년대, 90년대 두 번의 안식년을 가졌기 때문에 올해에도 한국에 가지 못하면 우주항공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멀리 두고 보시면서 행복하셨다. 아들이 미국에서, 세계에서 학자로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살아오셨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고 있었다.
1년 전에 아파트 문이 닫히면서 오른손 손가락 하나가 잘리는 아픔을 당했는데 상처는 아물었지만 아직도 손이 떨리고 있다는 소식이 새로운 비관적인 상황을 암시하고 있었다.
의사는 그가 일반의로서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교수님, 이제 큰 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서울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심란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외상으로 치료했는데, 상처는 아물었습니다만 어머니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나는 허망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다른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년이라도 어머니 곁에 있지 않으면 내 죄를 조금도 씻을 수 없겠다는 비애가 나를 엄습했다. 절박했다. 애절함 만큼 절박한 것은 없다. 어머니가 더 이상 혼자 살아갈 수 없으리란 막연한 비애가 나를 슬프게 했다. 언제나 “내 걱정을 말고 너 할 일을 하라”던 어머니. 미국에 와서 함께 살자는 아들의 제안은 늘 그렇게 거부되었었다.
이제 어머니의 세월은 얼마 남아있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60년대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부총장으로 일하고 있는 대학에서 온 1년 초빙교수 제안을 받아드렸다. 나는 풍랑의 바다 속에서 등대의 불빛을 바라본 감정이었다. 나는 그렇게 서울에 왔다.
1968년 5월 시애틀에 내려서 지금까지 나의 삶은 하이웨이를 달리는 차륜같았다.
동료 교수가 논문 하나 쓰면 나는 두 개를 쓰고, 책 한 권 저술하면 두 권을 저술하고, 학생들의 교수평가에서 늘 1위를 놓치지 않고 살아왔다. 그동안 결혼해 아들, 딸 하나를 얻고 중산층의 동네에서 편안함 삶을 살아왔지만 그 뒤란에는 평안함이 없었다.
늘 팽팽한 긴장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민자의 삶은 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처음으로 나 스스로 내 삶을 돌이켜볼수 있었다.
어머니.
언제나 거기 계셨다. 갖난아이 옆에 늘 어머니가 있듯이. 집에는 늘 어머니가 계셨다. 전쟁의 페허 속에서도 어머니는 아들을 부등켜 안고 지켜주었다. 남편이 북으로 납치된 후에 어머니에게 아들은 전세계였다. 아니 우주였다. 여학교 선생님으로 아들의 공부와 성공을 기도하면서 살아왔다.
아들이 미국으로 떠나던 날 김포공항 송영대에서 “너를 태운 비행기가 하늘 끝으로 날아간 뒤에도 나는 오래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는 편지가 아들을 보호해준 수호신이었다. 새벽마다 깨끗한 물 한 접시 웃목에 떠놓고 기도해 온 어머니. 어머니는 그렇게 살아왔다.
한국의 어머니. 아들의 성공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고, 성년이 된 아들이 결혼하여 그의 가정을 이루고 사는데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괜찮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는 주몽의 어머니, 조선의 심사임당, 그 어머니가 한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고 있었다. 1969년 여름 시애틀에서 만난 정명훈과 누이들의 어머니도 그랬다.
만 7년 만에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왔고, 그 이듬해 어머니는 손자를 받으려 아들을 찾아오셔서 6개월 체류하셨다. 다시 7년이 지난후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왔다. 어머니는 그 무렵 은퇴했다.
아들은 다시 어머니에게 미국에 오셔서 살자고 제안했지만 답은 똑 같았다.
“언어가 안되고, 자동차 운전도 못하는 내게 미국은 창살없는 감옥이 아니냐.”
“내 집 있고, 내 나라가 있는데 나는 여기가 좋아.”
62세의 노인이 아직 할 수 있었던 변명이 아니겠는가.
가난했던 60년대, 주머니에 70달러를 넣고 시애틀에 내려서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교수직을 얻어 테뉴어를 얻고 나서 한국을 찾아갔던 1974년까지 장거리 전화는 사치였다.
항공편지가 일주일 걸려 태평양과 미국 대륙을 건너왔고, 그 편지가 어머니와 아들을 잇는 다리였다. 세월이 가면서 전화는 자유롭게 걸리고 걸려왔지만 비행 시간은 만 24시간 걸리는 먼 거리였다. 노스웨스트로 워싱턴에서 출발, 디트로이트에서 한, 두시간 기다렸다가 다시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타면서 더 빠른 비행을 바라고 있었다.
알라스카 앵커리지에서 쉬어갈 때도 있었다. 나중에 대한항공이 워싱턴-서울 직행을 날라 14시간 비행으로 줄어들었지만 나이 들면서 긴 비행시간은 고단한 여행이었다.
1년이라도 어머니 곁에 있지 않으면 내 죄를 씻을 수 없겠다는 비애가 엄습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교단에서 은퇴한 후 여름마다 서울을 방문했다. 2주, 3주 여름방학은 어머니와 아들이 견우, 직녀처럼 만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32평 아파트에서 꽃을 키우면서 책을 읽으면서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어울려 가끔 설악, 제주, 남해 여행, 동남아 여행을 하며 즐겁게 노년을 보내고 아들이 오면 여행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가끔 동창회보에 실린 여행기를 보여주었다.
어머니와 함께 한 2주, 3주가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늘 거기 있을 줄 알았다. 세월이 가는 것을 알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마치 지구가 자전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듯이. 그렇게 지구 위의 생물은 현기증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밤이 가면 태양이 떠오르고. 우리들은 아무 걱정없이 내일을 약속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오면 우리들은 떠나야 한다. 약속할 수 없는 시간이 오는 것을 모르고 산다. 아들의 나이 54세에 이르도록 무지한 대학교수로 살았다.
세월은 더 이상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방관하지 않았다. 용서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 정립이 필요한 시간이 왔다. 허망했다.
3
서울에서 어머니를 지탱해 준 다른 축은 어머니-이모-외숙이었다. 그 삼각관계가 무너질 때 어머니를 지탱해준 다른 축은 무너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외할머니가 낳은 무남독녀였다.
외할머니의 오빠가 낳은 아들이 내게 외숙이 되고, 외할머니 언니가 낳은 딸이 내게 이모가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외숙도, 이모도 없다.
그냥 아저씨, 아주머니가 있을 뿐이다. 내가 철이 들어 사물을 바라볼 수 있었을 때 그리고 인척관계를 따져볼 수 있었을 때 나는 그들의 인간관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라고 단정했다.
용산 이모처럼 다정한 이모가 없고, 청파동 외숙처럼 가까운 외숙이 없다. 그들은 동기간처럼 거의 매일 전화로 안부를 묻고 살았다. 내가 서울에 오면 이모와 외숙을 방문하고, 좋은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라도 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살아남았을 때 그들은 어머니를 찾아와 위로했고, 나를 안아주었다.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와 아들을 한없이 위로해주었다. 우리들의 생활비를 보조해 주었다.
전쟁 기간에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살았었는데 그들은 우리들의 생존을 걱정해 주었다. 이모부가 철도청 기술자였고, 용산철도 관사에 살고 있어서 그 집을 방문한 기억도 있다.
외숙은 대법원 행정직에 그대로 남아있어서 어머니에게 끝없는 위안이 되었다. 중앙청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납치되어 가신 후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어머니와 아들은 살아남을 수도 없었는지 모른다.
내가 서울로 왔던 가을학기가 끝날 무렵 12월초 이모와 이모부는 서울를 떠나는 작별의 저녁식사로 우리를 초대했다. 정확하게는 외숙이 주선한 저녁이었고, 외숙의 두 딸이 이삿집이 나간 빈 집에서 케이터링한 저녁식사를 차렸다.
가족을 미국에 두고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돌아온 나를 외숙과 이모는 칭찬해주었고 고마워했다.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저녁식사 시간이 참으로 슬픈, 그러나 아름다운 시간인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을 하직하는 작별의 시간에 이모는 고향으로 간다고 표현했다. 이모부의 고향이 정읍이어서 그리로 떠난다는 사실은 이제 단순한 서울의 떠남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떠남이라는 의미였다. 이모가 외숙보다 한 살 위이고, 외숙이 어머니보다 두 살 위이니 이제 그들은 작별의 시간을 소중하게 나누고 있었다.
초겨울 가로수에서 떨어진 은행잎이 노랗게 포도를 뒹구는 모습보다 더 슬픈 모습이 조용한 아파트 빈 방에 흩날리고 있었다.
겨울숲의 모습은 신록의 숲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그 슬픈 변화가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살았다. 천치가 아닌가. 그래, 사람들은 모두 천치인 대목이 있다. 지구가 자전하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왔으니.
어머니는 그 날 저녁 후 걷잡을 수 없이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이모가 서울을 떠났을 때 어머니의 몸은 이미 황폐화되어 가고 있었다. 눈이 침침해지고, 그래서 책을 읽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바느질을 할 수도 없었다. 바늘귀에 실을 꿰메는 일을 내개 주시더니, 얼마 후 바느질 자체가 힘들어젔다. 겨울 솜이불을 새로 깔아주시던 어머니는 이제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했고, 아들이 좋아하던 달걀말이 요리, 생오징어, 김, 된장국을 시금치와 함께 밥상에 올려놓았다. 병든 어머니가 해주는 아침식사를 할 적마다 눈물이 솟았다.
눈물을 보이지 않게 하는 연습도 필요했다. 이별도 연습이 필요했다. 아침마다 어머니와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고 주말엔 어머니가 좋아하는 일본 음식점에도 가고,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지하에 있는 식료품 점에 가서 이미 준비된 반찬도 사왔다.
옆 아파트에 살고 있던 소설가 정소성이 들려 어머니와 아들이 오붓하게 사는 집이라고 말하고 갈 때 어머니는 행복했지만 조금씩 건강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강남 일원에 있는 삼성병원에 한 달에 한 번씩 다녀올 때마다 어머니는 힘들어했다.
옥수동 전철역 층계가 높고, 일원역 층계가 높아 노인이 다니기엔 힘들었다. 미국의 전철역엔 노약자들을 위한 에스칼레이터가 운영되고 있는데, 아직 한국은 거기까지 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 이제 택시타고 다니셔도 되는데.” 그러면 어머니는 택시 값이 너무 많이 나온다고 주저했다.
어머니는 경동시장에도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다니면서 근처의 아파트 단지 식료품상에서 사오는 것을 회피하고 있었다. 절약이 몸에 벤 어머니 습관을 고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전철역 층계를 오르내리면서 힘들어했다. 가난했던 시절을 살았던 어머니 세대가 있어서 지금 한국은 중진국이 되었고, 그런 근검절약으로 나라가 이만큼 지탱한다고 보았다. 사치와 낭비가 경제위기를 몰고 오고 있었다. 금융위기, 외환위기가 곧 한국을 강타하고 있었다.
파킨슨 병세는 아무리 약을 복용해도 좋아질 수가 없었다. 그 약의 부작용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치매를 가속화하고 있었다. 운동신경이 마비되어 부축하지 않으면 걷기가 힘들어지고, 치매현상이 가속화되어 혼자 외출할 수도 없었다. 결국 파출부 아주머니를 쓰기로 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파출부는 그녀의 집으로 갔고 아침이면 우리 아파트에 도착, 어머니의 보호자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아직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 아들이 부재중일 때 다른 보호자가 필요했다. 일생을 거의 혼자 살아오신 어머니가 두 사람의 보호자를 두고 산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파트 단지 상가에서 지갑을 그냥 두고 나오시는 빈도가 늘어가고, 여의도 중국 음식점에서 모이는 여학교 친구들 모임에 갔다가 종로 3가 역에서 5호선에서 내려 3호선으로 옮겨타는 것을 잊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무서웠다. 어머니의 병은 겨울저녁처럼 깊어만 가고 있었다.
파출부 아주머니는 우리 아파트에 함께 살면서 어머니와 지낼 수는 없었다. 가족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입주가 가능한 아주머니를 찾았더니 연변족 아주머니가 왔다.
조그만 보따리 하나 들고 들어선 아주머니를 내칠 수는 없었다. 먼저 면담이라도 하고나서 일자리를 제공하려던 것이었는데 그 여자는 그렇게 입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연변 아주머니와의 관계는 1년여,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이어젔다.
아주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다 우리 집으로 왔는데 일이 힘들고 경기가 안좋아 월급도 못 받아서 우리 집으로 왔다 했다. 이미 불법 체류자였다. 연변족 사람들은 거의 모두 불법체류자였다. 1년 방문비자로 한국에 들어와 눌러앉아 있는 꼴이다.
아무도 그들을 추방하지 않는다. 동포이기 때문에.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적어도 3년이상 일해야 “투자한 돈이 빠진다”고 아주머니는 말했다. 한국여행을 알선하는 거간꾼들이 1년치 급료에 해당하는 거간비를 챙기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그러나 연변에서 온 아주머니는 한국어를 쓰고 있었지 윤동주가 누구인지도, ‘별 헤는 밤’이 누구의 시편인지도 모르는 여자였다.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에 관해서도 그녀는 아는 것이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조국이라는 데를 찾아왔지만 조국이 어떤 나라인 것을 알지는 못했다. 핏줄이라는 것이 이럴 수도 있구나. 중국의 국적을 갖고, 중국 여권을 갖고 한국에 온 사람들.
월 80만원을 받고 일했다는 아주머니에게 나는 월 1백만원 월급을 약속했다. 어머니의 병간호와 세끼 식사, 아침, 저녁 아파트 주변 산책이 일의 내용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 식료품점에 가서 필요한 것들을 사오는 일에서부터 어머니 목욕시키는 것까지.
겨울방학에 아주머니를 믿고 나는 버지니아 집으로 왔다. 미국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면 어머니는 아들의 목소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내 뜻을 전달하게 되었다. 청각이 나빠지고, 시각이 나빠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기도 버거웠다. 이미 그랬다. 내가 서울을 떠나기 전에도.
매일 전화해도 어머니는 아들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일생을 아들을 위해서 희생한 어머니가 이제 아들의 목소리를 모르고 있다. 이럴 수도 있는가 싶었다.
외숙이 지팡이에 의지해 옥수동 아파트를 가끔 방문하지만 나는 아주머니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겨울방학은 그러나 짧게 끝났다.
어머니가 순천향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옆 동네 아파트에 사는 정소성이 전화로 알려주었다. 대치동에 사는 대학동창 춘근에게 나 부재중에 어머니를 보살펴달라 했는데 이웃이 어머니 입원을 책임져 주었다. 아들이 멀리 있을 때 결국은 인간이웃이 사촌보다 가까운 법인 것을 알았다.
춘근이는 내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었던 기간 자기 어머니 생일은 잊어도 내 어머니 생일을 기억했던 친구. 아들 노릇을 아들보다 더 잘했던 친구도 강남에 살고 있으니 옥수동 현대 아파트에 사는 작가보다는 한 발 늦을 수 밖에 없었다.
내게 가까운 또 한 사람은 내가 서울의 대학에서 만난 제자였다. 명희는 울진출신으로 마포구 신수동에 자취하고 있었던 학부 학생이었는데 내 처지를 동정하고 있었다.
마음이 따뜻했던 아가씨. 어느날 비를 맞고 교정에 들어서는데 우산을 받쳐주어 사제지간의 정을 따로 느꼈던 제자. 그녀는 내게 어머니를 돌보아 드릴테니 미국의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지내고 오라고 당부했던 아가씨. 그 세 사람을 믿고 미국에 갔지만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인 것을 어쩌랴.
연변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하루 휴일을 챙기기 때문에 은아는 하루 어머니의 간병인으로 자원봉사자가 되었다. 오히려 명희가 어머니를 진정으로 보살펴주는 간병인이었다.
아들은 아름다운 숨소리를
어머니가 잠든 방 문 앞에서 듣고 있었다
등창이 생기지 않도록 등을 마사지하는 일이라던가 병원에 모시고 가는 일이라던가. 아주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사람이지만 돈을 버는데 따른 책임감이 결여되었다.
그 여자는 노인과 한 방에서 잠을 자기를 꺼려했는데 명희는 노인과 함께 하루를 지내고 갔다. 어머니를 아들 혼자서 간호하기는 어려웠다. 목욕시키는 일, 소변, 대변을 보는 일을 누군가 돌보아주어야 하는데 아들이 하기는 참으로 힘들었다.
운동량이 부족하니 자연 변비증이 생기고, 2, 3일에 한번 관장을 하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명희는 그래서 천사같은 여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천사같은 여자가 정말 존재하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었던 인간애를 나는 나이어린 소녀, 아직 여자라고 부르기엔 어린 아가씨에서 느끼고 있었다.
1월 중순에 퇴원해서 집에서 기브스를 하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게 되니 다시 눈물과 죄책감만 커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우리집으로 가자”고 말씀하신다. 이게 우리집이라고 말해도 막무가내로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하신다.
“어머니, 우리 집이 어디에 있어요?”
물어보면 아무 대답이 없다.
“어머니, 가회동 집으로 갈까요!”
아무 답이 없다.
“어머니, 사천으로 갈까요.”
아무 답이 없다.
어머니의 유년시절과 외할머니 무덤이 있는 고향인가, 아니면 가회동 고가를 회상하시는 것일까.
파킨슨스병 환자들은 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환상에 젖는 시간이 많아진다. 신경계통의 전문의는 그리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이틑날엔 “학교에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가야한다면서 옷을 꺼내 입고 외출준비를 해서 “어머니, 은퇴하셔서 이제 아이들이 기다리지 않는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부축해서 언덕을 내려가다가 힘들어 쉬어야 겠다고 아들이 말하니 걸음을 멈추었다.
파킨슨스병 환자들은 유년시절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어머니를 찾아가기를 바라고, 젊은 날의 교사생활로 회귀하는 추억의 낭만을 갖고 있는 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강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아들은 살아온 삶의 여로를 더듬고 있었다. 연어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축제로 만드는 강원도 양양이 있고, 연어의 회귀를 소설로 써 성공한 작가도 있다.
조국을 떠난 이민자들이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던 조국은 무엇일까. 아들은 병든 어머니 옆에서 “어머니, 아닐까?” 반문했다. 겨울 냉기가 스민다. 다시 어머니를 부축해 아파트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있는 나라가 조국이다. 유년시절이 있는 나라가 조국이다. 친구들이, 선생님들이 있는 나라가 조국이다.
추억이 있는 나라가 조국이다. 종로가 있고, 비원이 있고,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있고, 중·고등학교가 있고, 대학이 있는 나라가 조국이다. 그러나 조국의 근원과 시작은 어머니. 그 어머니의 신경계통이 마비되어가고 있음을 옆에서 바라보는 비애는 혹독했다.
자꾸 내 집으로 가자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머니의 유년이 있는 외가입니까,
아니면 이대(二代)가 비어있는 시댁입니까
도둑 고양이들이 일가를 이루고 있는
은행나무 집에 들어가 살수가 없습니다
아들이 아직 이역을 방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눈물의 여왕이신 어머니
눈에 눈물은 보이지 않고
아들의 눈에 눈물이 보입니다
유년시절 들녘을 찾아가는 눈빛이
서러울 뿐입니다
어머니는 부정맥이라는 진단도 받았다. 병이 다른 병을 동반하면서 해체되는 육체와 정신을 마비한다. 숨소리가 생명이다. 숨을 거두면 사람은 죽는다.
아들은 아름다운 숨소리를 어머니가 잠든 방 문 앞에서 듣고 있었다. 숨소리는 아들을 안도하게 만들었고, 위안을 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의 숨소리
심장이 불규칙으로 뛰는 어머니가
내게 준 가장 아름다운 위안은
한 밤 숨소리입니다.
어머니의 방 문에
내 귀를 대이고
듣는
숨,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아시나요
몸의 균형을 잃고 응접실 차이나 캐비넷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쳐서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목련화가 피었다 떨어지고 진달래가 한창이었다. 조금이라도 미리 알았던들 피할 수 있었던 사고였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 되었다. 연변 아주머니를 탓할 수도 없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으니까. 그 후 어머니는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었다. 누어있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조금 음식을 들게 했지만 스스로 식욕을 잃었다. 아니 음식을 삼킬 힘도 잃었고, 물을 마실 힘도 잃었다. 식욕이 아니라 삼키라는 뇌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노인의 위에 구멍을 뚫어 호스를 박아 액체 음료를 공급하는 마지막 수단을 의사는 내게 말했다. 코에 호스를 넣어 액체 음식을 공급하는 방법을 삼성병원 응금실에서 터득했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노인은 집에 둘아오자마자 호스를 빼버렸기 때문이다.
소처럼 살아가는 삶의 질은 유지할만한 가치가 없었다. 아들 혼자 울고 있었다. 그날 밤에도 연변 아주머니는 혼자 응접실에 나와 태연하게 연속극을 보고 있었다. 한 편의 비극과 희극이 한 아파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4
병이 깊어가고, 그렇게 봄학기가 오고 있었다. 나는 1년후 도저히 어머니를 두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대학에 방문 교수가 아닌 전임 교수직을 구했다. 내 개인적인 사정을 알게 된 대학은 전임 교수직을 원하면 미국 시민권을 버려야 한다고 알려왔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개 교수채용 공고가 일간지에 나가고, 나는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기에 바빴다. 왜 그리 필요한 서류가 많은지? 그래도 가짜 박사가 넘치는 대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교에 가서 학부, 대학원 졸업증서, 성적증명서, 미국 대학의 대학원 졸업증서와 성적증명서, 그동안 가르처온 대학에서 재직증명서, 추천서, 그리고 지난 5년 발표한 연구논문의 복사본 만들기가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이력서 한 장으로 대학 교수직을 얻었는데, 한국은 대학교수를 원하는 사람들을 모멸하는 문화를 갖고 있었다.
이력서 한 장에 그동안 살아온 삶이 다 들어있는데 왜 이 나라는 불필요한 서류준비로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하는가. 미국 대학처럼 이력서·서류 전형으로 세 사람을 선정, 인터뷰에 초청해서 면담하고 공개 강의를 하게 해서 한 사람을 정하면 되는 일을 처음부터 산더미같은 서류를 챙기도록 하니 시간낭비가 아까웠다.
예를 들면, 나는 모교에 가서 성적증명서를 떼어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졸업증명서를 따로 떼어와야 한다고 대학 사무직원이 친철하게 알려 주었다. 성적증명서 안에 졸업년도와 학위가 명시되어 있는데도. 대학이 서로 수수료 수입을 늘리려는 의도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먼 길을 다녀오다가 전철 안에서 혼자 미친사람처럼 박장대소를 했다. 이 나라에 희극적 요소가 상당이 들어있다. 낭비가 참 많은 사회가 한국이구나. 낭비는 부유한 사회가 가질 수 있는 사치인데 이 나라는 그리 부유한 사회도 아닌 것 같았다. 종이낭비, 시간 낭비, 시간이 금인데.
대학 도서관에는 미국 학술지가 다 구비되어 있지 않아서 여의도 국회도서관에 가서 내가 발표한 학술논문들을 복사해왔다. 내가 발행한 책들은 아마존닷캄으로 주문해서 마감날에 맞추었다. 산더미 같은 서류를 모두 제출하고 났더니 긴 한 숨이 쉬어졌다.
대학 교수직이 한국사회에서 그래도 괜찮은 직업이라 그래서인지 내가 응모하는 자리에 수십명이 몰려들었고, 나는 1차, 2차 심사를 거처 면접과 공개강의를 끝냈다. 대학총장은 심사위원회가 추천한 두 사람중 한 사람을 최종 선발할 권리가 있었다. 그 과정은 길고 긴 터널이었다. 그러나 병든 어머니를 위해 나는 모든 것을 감수했다.
나이가 문제였다. 55세의 원로교수가 지망했다는 사실이 대학가 뉴스였다. 내가 임용되면 ‘기적’이라고 모두들 수군대고 있었다. 모두 30대 박사학위 소지자들이었고 한 사람이 40대 초반의 국책연구소 연구원이었다. 나이가 장애일 수 있지만 절대적인 장애물이 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했다. 나이든 만큼 학자적 성취를 했다고 나는 주장했다.
그리고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할 일이란 기다림이었다. 가을학기가 그렇게 끝났고, 겨울방학이 기다림의 절정이었다. 채용이 되면 봄학기부터 전임교수로 발령이 나온다.
나오면 나는 미국 국적을 포기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할 일 없이 어머니 옆에만 있다는 사실도 나를 괴롭혔다.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어머니, 그러나 내가 할 일이 있으면서 어머니 옆에 있고 싶었다.
마침내 김진현 총장이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김교수님, 축하합니다. 일단 김교수님이 1순위로 올라왔고 나는 총장으로써 김교수를 선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하게 할 것이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말씀하시죠.”
“우리대학에 전임으로 오시면 바로 미국 국적을 버려야 합니다. 불편하시겠지만 그것이 한국의 법적 현실입니다. 세계화를 떠들고 있어도 아직 국수주의적 민족주의가 판을 치는 나라이지요. 감사에 걸리면 저나 김교수나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 규정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학이 제게 교수직을 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의 노모가 병 중에 계시고 저는 어머니 옆에 있기 위하여 미국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연세대 송자 총장이 2중국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후 시회적 문제가 되었고, 한국 대학이 이 문제에 민감합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총장님, 이 대학에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도 내 개인적인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대학을 도시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내가 전공한 과학, 기술, 공공정책이나 환경정책이 중요한 부분이니 이 대학을 위해 전심을 다해 가르치고 연구하라고 당부했다.
그 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제 전임교수가 되어 어머니 옆에 있게 되었다고 말씀드리니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알아듣고 있다는 표현은 내가 받아드린 것이다.
이미 말을 잃은지 오래. 그러나 어머니의 색바랜 어머니, 내 외할머니의 사진을 눈 앞에 보여드리고, “이 분이 누구야?” 물으면 “내 어머니”라고 짧게 답하고 만다. 그리고 이 세상이 귀찮다는 표현을 짓는다.
어머니의 이마에 마지막 키스를 했을 때
아직 어머니의 따스한 체온이 남아있었다
5
그래도 세월을 가고 오고 있었다. 봄학기가 왔다가 갔다. 봄은 어느새 여름이 되고, 여름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가을은 짧게 왔다가 간다. 그 가을에 어머니는 폐렴증세를 보이더니, 결국 입원하게 되었다.
교대 근처에 살고 있던 시동생, 나의 숙부가 문병 와서 “이제, 오늘, 내일”이라고 불길한 한마디를 남기고 갔다. 병세를 진단하는 나이가 있는 분이 짐작할 수는 일이라고 보았다.
아침 저녁, 휠체어에 앉혀 아파트 주변을 한바퀴 둘고 들어오는 사이에 감기증세가 왔고, 감기는 폐렴증세로 번젔다. 가을 미풍에도 낙엽은 떨어지고, 어머니는 낙엽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10월까지 어떻게 견뎌냈는지 기억할 수도 없다. 11월 4일 아침 119 구급차에 실려 어머니는 한양대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 전에는 택시로 삼성병원까지 가고 왔었는데 명희가 119 구급차를 전화로 불러주었다. 그 날 저녁 의사들은 운명의 시간을 준비하라고 전했다. 알부민 주사가 기적적으로 어머니의 생명을 연장해주었다.
그렇게 3월이 왔다. 병실에 들리면 눈이 마주쳐도 아무 표현이 없는 어머니. 그 전에는 눈이 마주치면 어머니는 한동안 아들을 응시했는데 그나마 의식이 꺼져가고 있었다.
4개월 병원생활 속에서도 몇 번 더 운명의 시간이 왔다고, 준비하라는 의사의 전화를 받았지만 어머니는 4개월 연명했다. 한 밤 중에도 병원에 쫓아가던 슬픔이 옥수동과 행당동 언덕의 병원 사이에 깔려있다.
한국의 병원은 세계 열한번째 나라 병원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환자 측에서 간병인을 구해야 한다.
연변 아주머니는 병원에서 잠을 자는데 익숙하지 않아 어머니를 떠났기 때문에 나는 새 병원 간병인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새로 구한 여자도 일주일에 하루는 휴일이 필요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간병인 자리를 지키던가, 명희가 지킬 수 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병원의 풍경이었다.
응급실의 여유가 없어서 복도에서 하루를 기다리다가 저녁 무렵 복도에서 코에 호스를 박아주던 한국 최고의 삼성병원을 내 생애에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입원을 하려 해도 빽이 있어야 한다는 나라. 대학 친구 춘근이가 그나마 한양대 병원 응급실로 가게 도와주었고, 입원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어머니의 온 몸에 이 케이지 전류를 통하도록 해 놓고 숨이 넘어가는 시간을 기다리던 슬픔의 한 덩어리였다.
“숨이 멎었습니다.”
간호원이 알려준 마지막 메시지였다.
어머니의 이마에 마지막 키스를 했었을 때 아직 어머니의 따스한 체온이 남아있었다.
영안실로 옮겨졌고, 3일후 아버지의 빈 무덤을 열고 어머니의 관이 들어갔다.
보은 속리산 기슭에 어머니는 남편의 무덤을 만들었고, 그 안에 아버지의 유품을 넣어두었다.
내가 열 살 때 마지막 본 아버지의 최후를 아는 이는 없다. 간간히 압록강변 요양소에서 숨졌다는 소문도 나돌았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도리를 어머니는 그렇게 했다. 그 자리에 어머니가 들어갔다. 20대 초반 두 분이 결혼, 초야의 신방으로 들어가듯 어머니는 그렇게 아버지의 무덤으로 사라젔다.
한 시대가 그렇게 사라젔다. 일본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성장, 젊은 나이에 해방의 감격을 맛보고, 곧 전쟁의 비극을 경험했던 아버지, 어머니의 시대는 그렇게 속리산 자락의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하관은 한 시대의 하관이었다.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이제 더 이상 오열할 수도 없었다.
내 눈에는 더 이상 눈물이 흐를 것 같지 않았다.
한 삽 흙을 떠 넣고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삼우제에 다시 속리산을 찾았고, 나는 그렇게 한국을 떠났다.
6
아내가 내 영주권을 신청해주어 나는 영주권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미국 이민국 어느 관리도 나와 어머니의 관계를 모른다. 알려 하지도 않는다.
미국 국적을 버린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설득하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 진술하고 서술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나라로 돌아온 내가 다시 영주권을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미국 국적을 취득했었을 때보다 더 부끄러웠다. 돌아가라면 돌아가고 싶다.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해 미국에 와서 1977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었을 때 나는 20년 후에 내 앞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짐작하지 못했다.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어머니, 이 세상보다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살았던 어머니가 언젠가 숨을 거두리라는 간단한 사실도 모른 채 학자연하고 살았다.
이민국 사무실에서 나오니 주차시간이 지났다고 벌금 쪽지가 자동차 유리 위에 끼어 있었다.
나는 내 집에 돌아와 청와대로 한 장의 편지를 쓰고 있었다.
한국 대통령 귀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나라에서 살다가 갑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변했고,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자기 집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다국적 기업이란 말이 이제 일상용어가 되어있습니다.
이름있는 기업이면 다국적 기업입니다. 한국의 삼성, 현대, LG가 한국의 대표적 다국적 기업입니다. 중소기업도 다국적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국경의 의미를 희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2중 국적의 허용이 논의되고 있고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28년을 미국에서 살다가 병든 어머니와 몇 년을 함께 하기 위하여 미국 국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으로 돌아갔습니다. 서울의 대학이 다른 선택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국가 공무원법이라고 말했습니다. 1999년 필자는 그것을 받아드렸고, 지금 필자는 그에 따른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글은 2중 국적을 허용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씌어지고 있습니다. 필자와 같은 희생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정부가 2중국적을 허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필자는 1968년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갈 수 없어(반체제 문필인)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살다가 1998년 초빙교수로 서울의 대학으로 갔습니다. 1999년 전임교수가 되었을 때 필자는 미국 국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회복하는 조건을 충족해야만 했습니다.
서울의 미국 대사관에서는 필자의 정직한 진술에 “강요에 의한 미국 국적 포기는 받아드릴수 없다”는 판결을 통고해왔고 그래서 필자는 ‘소설적’ 이유를 만들어 다시 써서 미국 대사관에 제출했고, 그 결과 미국 국적을 ‘어렵게’ 상실했고, 한국 국적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서울의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2년후 어머니는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필자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미국 국적을 갖고 있는 저의 아내는 필자의 영주권을 신청했습니다. 미국 연방수사국의 신원조회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기다림의 고통이 만만치 않습니다.
테러리스트와의 전쟁이 이방인의 신원조회를 오래 끌고가며 어렵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20여년 세월을 미국의 모범시민으로 살았었지만 지금 미국 정부는 필자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영주권을 얻을 때까지 필자는 28년 부어놓았던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없고, 병이 나도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미국 국적을 갖고 있으면 아프리카 밀림 속에 있어도 사회보장 혜택이 주어지지만 미국 국적을 포기한 필자의 죄값이 이렇게 크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와 3년을 함께 살기 위하여 필자는 죄값을 달게 지불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대학이 필자에게 미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게 배려했더라면 치루지 않아도 될 죄값을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대학교수가 되기 위하여 미국 국적을 버리고 났더니 외국학자들이 한국의 국립대학 교수로 채용되는 소식을 일간지에서 읽으며 한국의 불공정 거래를 탓했지만 그때 상황에서 필자는 선택이 없었으니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당시의 한국 법은, 지금도 전근대적인 민족주의 문화의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에도 권력과 가까운 사람들은 정부공사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미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법의 한계 안에서 산 필자의 소시민적인 무력함을 탓할 수 밖에.
이민1세는 어쩔수 없이 조국과 선택한 나라를 방황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조국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청년시절을 보내고, 2년의 군복무를 끝내고 외국에 유학생으로 나와 일하다 아들이 조국에 가서 일할 수 있었던 기회는 오직 미국국적 포기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외국으로 나와 영주권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영주권을 다시 받을 때까지 외국여행도 불가능한 ‘영어의 몸’이 되었으니 한국정부는 필자와 같은 이들에게 선처를 내리기를 기대합니다. 미국 국적박탈이 한국에 돌아가 일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군복무를 피하기 위해, 한국의 세금을 피하기 위해 외국국적을 취득하는 이들에게 선처를 베풀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선의의 사람들이 불필요한 손해를 보는 일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재외동포의 2중국적 논의에 한국인이 깊이 사려해야 할 사실은 이민1세들은 조국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민 2세, 3세들은 이미 그들이 태어난 나라에 귀속하게 됩니다. 지나친 민족주의적 감정이입은 변화하는 세상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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