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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17>

임정의 독자적 비행대 창설 실패했지만
한국공군 뿌리 '한인비행학교'로 이어져

1920년 10월 폭풍우로 김종림의 쌀농사가 결정적 타격을 입고 비행학교의 실체적 기능이 정지되면서 임정의 독립군 공군 양성 계획도 표류했으나 공군을 갖고자 하는 꿈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비행학교를 태동시켰던 모든 요소 가운데 변한 것은 비행학교 재정을 도맡다시피 했던 김종림의 재정상태 하나였다.

게다가 비행학교를 주도한 노백린이나 김종림은 상식을 뛰어넘는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고 무엇보다 비행학교 최대의 재정후원자였던 김종림은 1921년에도 전해와 같은 규모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한인들은 비행학교를 다시 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 1921년 6월 1일자는 "퀸트에 있던 한국인 비행훈련장을 다시 열기 위해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는 언급이 오늘 있었다."고 보도했으며 신한민보 1921년 8월 25일자는 비행학생 지원을 위한 재미한인사회의 기부자 명단을 게재했다.

임정이 1921년 7월 18일 이 비행학교 출신으로 조종사가 된 인물 가운데 박희성과 이용근을 육군 비행병참위(소위)로 임명했을 때만 해도 독립군 공군 양성이라는 계획은 진행형인 사안이었다.

그러나 김종림의 사업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면서 이 비행학교는 결국 다시 날지 못했고 이곳 출신들도 뿔뿔이 흩어져 민간인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거나 미군이나 중국군에 들어가 직·간접적으로 대일전쟁에 참가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김자중은 중국 동삼성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벌였던 군벌 장작림의 항공대에서 활약했고 이초는 미국 전략첩보국(OSS: 미국 중앙정보국의 전신)이 주도했던 한반도 침투작전인 납코(NAPCO) 작전에 참가한 것으로 주장된다.

상해 임시정부는 윌로우스에 세웠던 한인비행학교가 날개를 접자 중국군이나 소련군 비행학교에 한인청년들을 파견해 조종사로 훈련시키는 방식으로 선회했으나 이 역시 독립군 공군 창설이라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홍선표 박사(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윌로우스에 세웠던 한인비행학교는 해방 후 한국 공군 창설의 기원을 이루게 함으로써 한국군 역사에 놀라운 업적으로 이어졌다.

홍윤정 박사(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는 "임정은 독자적 비행대를 편성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43년 8월 공군설계위원회조례를 공포해 공군을 창설하려 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고 1945년 3월 미군과 합작으로 한국공군 창설 계획을 수립했으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시행되지 못했다."면서 "그러나 임정의 조종사 양성과 공군 창설 노력은 대한민국 수립 후 공군창설로 계승됐다."고 강조했다.

한국 공군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공군의 연원이 윌로우스 한인비행학교라고 자부하고 있다. 조국 독립이라는 염원 속에 독립군 공군 양성을 위해 재미한인사회가 보였던 희생과 헌신은 한국현대사와 미주한인이민사에 길이 빛날 조각이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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