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15>
폭풍우로 김종림 등 한인 농장 큰 타격
후원 끊어진 비행학교 재정난에 문 닫아
그러나 이 비행학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에 따라 캘리포니아가 누렸던 곡물특수가 없어지면서 쌀농사를 통해 큰돈을 벌었던 한인들의 경제력이 흔들리는 가운데 보다 직접적으로는 특히 1920년 10월 폭풍우로 김종림의 사업이 결정적 타격을 입으면서 날개를 접기 시작했다.
북가주 글렌카운티에서 발행되던 미국신문 '글렌 트랜스크립트'(Glenn Transcript) 1920년 10월 13일자(원래 신문에는 발행일이 1921년으로 인쇄돼 있으나 이것은 오류)는 "불행히도 지난주 폭풍우로 '김 앤 포터'(Kim and Porter)가 피해자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들은 (잘 영글어 이삭이) 무거운 벼가 1700에이커나 되는데 벼들이 절망적으로 넘어졌다."고 보도했다. '김 앤 포터'는 김종림의 쌀농사 업체였다.
이 신문은 계속해서 "이 때문에 전량을 인력으로 수확해야 한다. 이들은(김종림 일행을 지칭) 어제 이곳에 와 계약을 체결하고 힌두인 200명을 고용했는데 일인당 인건비가 하루 4달러에 숙식도 제공해야 한다. 기계 수확이 1에이커에 10달러면 되는 것을 고려하면 이 회사가 폭풍우로 입은 타격은 쉽게 짐작될 것"이라고 썼다.
김종림은 지금까지는 알려진 바와는 달리 1920년 11~12월 발생한 폭우와 홍수로 직접 타격을 입은 것이 아니라 같은 해 10월 3~9일 주간 윌로우스 일원에 내린 폭풍우로 벼가 너무 누워 기계 추수가 불가능해 인건비 부담이 너무 컸고 이후 기온도 예년보다 낮아 추수가 계속 연기되면서 부담이 가중됐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림과 함께 이 비행학교 후원에 적극적이었던 다른 농장의 한인들도 사정은 그와 본질적으로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재미한인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무게 중심은 샌프란시스코 윌로우스 등을 중심으로 하는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비즈니스의 중심도 농업에서 상업으로 바뀌어갔다.
김종림의 막내아들 김두원씨는 "선친이 이 해 농사만 마치고 은퇴할 계획이었다고 어머니가 생전에 전했다"고 최근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이 증언은 김종림이 1차대전 종전에 따라 쌀 특수가 끝난 것으로 보고 쌀농사에서 곧 손을 뗄 계획이었음을 시사한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통상 10월 첫째 주부터 쌀 수확을 시작하므로 김종림의 농장이 1920년 10월 둘째 주에 발생한 폭풍우에 며칠만이라도 앞서 수확에 착수해 그 엄청난 부를 지켰다면 비행학교와 독립군 공군은 어떻게 됐을까 깊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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