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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 비행학교<14>

부상 당한 박희성, 이용근과 함께 시험
국제항공연맹 조종사 자격증 같이 따내

박희성이 레드우드비행학교에서 처음 조종사 자격증 시험을 치르던 날 기체사고가 난 비행기는 원래 새크라멘토 비행학교의 백인 비행교관 소유로 박희성과 이용근 등 한인학생들의 애국심에 감동해 무료로 빌려준 비행기였다.

박희성의 이날 사고에 대해서는 현지의 미국언론도 관심을 보여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Willows Daily Journal)과 '글렌 트랜스립트(Glenn Transcript)'도 게재하고 있다.

박희성은 타고난 강골인 듯 불과 3주도 못돼 퇴원해 다음 달인 5월 22일 새크라멘토 비행장에서 조종사자격증 시험의 마지막 절차만 다시 치르고 합격했으며 두 달 후인 1921년 7월 7일 국제항공연맹(FIA)으로부터 조종사자격증을 받았다.

박희성이 새크라멘토 비행장에서 시험을 치르던 날 이용근도 같이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 국제항공연맹으로부터 조종사자격증을 받았다.

이용근은 원래 박희성이 사고가 나던 4월 10일 박희성에 이어 시험을 치를 계획이었으나 박희성의 비행기가 기체고장으로 추락해 산산조각 나는 바람에 시험도 치르지 못한 터였다.

이용근은 임정이 윌로우스에 비행학교를 세우기 전부터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시티에 있는 미국인 비행학교에서 한장호.장병훈 등과 함께 비행술을 배우고 있었으며 1920년 6월 17일 이곳 과정을 마친 다음 임정의 비행학교로 옮겼다.

노백린 군무총장이 윌로우스에 비행학교를 세우기 위해 레드우드비행학교를 방문했을 때 이용근 등 한인학생 6명이 노백린과 함께 촬영했던 기념사진은 당시 독립신문에도 크게 보도돼 조선에서 독립운동의 의지를 다시 불태우게 했으며 오늘날 한국 공군박물관에도 자랑스럽게 전시돼 있다.

이용근은 1890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나 숭실중학(1906-1911)과 평양 관립일어학교(1911-1912)를 마친 후 조선에서 3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16년 미국으로 왔다.

이용근은 처음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1~2년 농장일을 하다가 1917년 로스앤젤레스로 옮겼으며 이곳에서 흥사단에 가입해 흥사단 제80단우가 됐다.

임정은 1921월 7월 14일 정례국무회의에서 박희성과 이용근을 비행장교로 임관시키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포상금도 주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른 공식적인 임관명령은 이로부터 4일 후인 7월 18일에 있었다.

그러나 박희성은 추락사고 부상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면서 결국 독립전쟁에 참가하지 못했으며 그렇게도 원하던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한 채 41세에 불과한 나이로 193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영면해 있는 로스앤젤레스 도심 공동묘지는 일본인들이 애용하는 곳으로 변해 아키히토 일왕이 왕세자 시절 기념식수를 했던 곳이다.

박희성은 바로 그 기념식수에서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일본인들의 묘에 둘러싸인 채 잠들어 있고 묘비명 'Son of Korea'(한국의 아들)와 태극문양만이 외롭게 그를 지키고 있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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