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13>
박희성 등 2명 독립군 비행장교로 임명
한국 공군사관학교의 전신이라 불릴만
이 비행학교에 대해 잘 아는 학자들이 오는 6월 10일로 창설 60주년을 맞는 한국 공군사관학교가 이 비행학교의 법통을 잇는다고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박희성의 유족에 따르면 그는 1910년대 후반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에 다닐 때 형인 박희도가 "학교에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미국으로 가서 비행술을 배워 독립전쟁에 참가하라"고 해서 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왔다. (박희도는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했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으나 일제말기에 변절한 것으로 돼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다.)
박희성은 1920년 2월 비행학교가 개교하자마자 입교해 정몽룡 조종익 등 다른 한인생도 23명과 함께 비행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임정이 박희성을 이 학교에 파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보다 확실한 검증이 필요하다.
박희성은 같은 해 말 김종림의 농원이 타격을 입으면서 비행학교가 기능을 못하게 되자 이듬해 1월 비행학교 소재지인 윌로우스와 가까이 있는 새크라멘토 소재 미국인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계속했다.
박희성의 소개로 이용근도 3월부터 이 학교에서 훈련을 계속했다.
1920년 3월 31일자 신한민보는 박희성.이용근 등 한인 비행학생 4명이 "3월 20일 윌로우스 우리 군단에서 사용하던 우리 비행기를 연마하여 가지고 박희성씨가 타고 그 외 3명은 배종하고 비행교사는 자기 비행기를 타고 박씨와 같이 공중에 쌍으로 날아 노다이(?) 운동장에 감에 수천 명 군중은 모두 공중을 향하여 '핼로우 보이'하고 수건을 휘둘렀다.
박희성씨가 서서히 내림에 수천 명 남녀 군중은 한인소년비행대장이라 부르며 치하함을 마지않고 혹은 태극기도 만져보며 혹은 박희성씨와 악수도 하는 광경은 참으로 우리 비행학생들의 흥기를 돋우었는데 그 군중에 서서 보는 일인들은 눈이 둥그레져 보았다더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박희성은 조종술이 매우 뛰어났던 것 같다. 그는 새크라멘토 비행학교에 다닐 때도 조종술이 워낙 뛰어나 학비가 면제됐으며 당시 신한민보도 "우리 비행학생 중에 가장 이름이 높은 박희성"이라고 표현했다.
그렇지만 박희성은 이해 4월 10일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시티 비행장에서 조종사자격 시험을 치르다가 기체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몰렸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신한민보는 "박희성은 처음에는 시험을 잘 치르고 마지막 6000척을 오르는 시험을 치르다가 불행히 비행기가 흠이 나 300척 위에서 떨어졌는데 박씨가 탔던 비행기는 전부 파상되고 박씨는 30분 동안 기절하였다가 천행으로 생명을 보전하였는데 하체가(?) 크게 상하여 의사의 수술을 받고 겨우 생명의 위험을 면하였더라."며 당시 정황을 전하고 있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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