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12>
'독립전쟁은 비행기로' 졸업식 축사
일본은 이 비행학교에 대해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이 수신자로 돼 있는 일본의 1920년 9월 20일자 정보보고서 '국외정보: 최근 구미에 있어서 불령선인의 행동'(문서번호: 고경 제29493호 비수 12219호)의 요지는 "지난 7월 7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당일 교장 노백린 총재 김종림은 장래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은 비행기에 의존하는 것 외의 수단은 없다고 극언을 했다. 현재 연습생은 25명이고 무선전신 장치가 있는 완전한 비행기가 5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비행학교에 몇 대의 훈련기가 있었는지는 좀 더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훈련기에는 'K.A.C'라는 표시도 선명하다. 이것이 실제로 무엇의 약자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지금까지 본국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대한인비행가구락부를 뜻하는 'Korean Aviation Corps'나 'Korean Aviation Circle'이나 'Korean Aviators Club'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비행학교를 깊이 있게 연구한 케네스 클라인 남가주대학(USC) 동아시아도서관장은 최근 인터뷰를 통해 "이 비행학교는 동호인 모임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공군양성을 위해 공식적으로 추진한 곳이었다.
'K.A.C'는 '대한민국 공군'(또는 '대한민국 항공대')을 뜻하는 'Korean Air Corps'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미국의 경우도 비행대나 항공대라는 의미로 1차대전 때는 'Air Service'를 쓰다가 2차대전 전에 'Air Corps'로 바꾸었다가 2차대전이 지나서야 공군이라는 의미로 'Air Force'란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공군에 대한 개념으로 적당한 한글을 찾지 못했던 재미동포들이 영어로는 보다 명쾌하게 표현했던 셈이다.
학생들이 자신을 사관생도라 여기고 재미동포들도 이 학교를 사관양성소라 부르면서 사관학교로 간주하는 장면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무렵 비행학교 학생 16명이 창립회원이 돼 '대한인 비행가 구락부'를 조직했다.
한인 최초의 파일럿 클럽인 이 모임은 한장호가 회장이었으며 비행학교를 위한 김종림의 헌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은제 컵을 선물했다.
당시 신한민보는 1920년 8월 5일 현재 김종림 농장의 모습을 "망망 무제한 평원광야의 3000여 에이커의 넓은 들"이라며 "이곳에 동포 32명이 같이 살고 비행학교에 학생 16명이 기숙하는데 8월 6일 이른 아침에 연습장에 나가서 비행기 연습을 봤다"고 쓰고 있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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