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10>
동포 200명 참석 7월5일 역사적 개소식
오림하와 미국인 수석교관이 시범 비행
신한민보 1920년 3월 19일자는 "윌로우스 비행학교에 나아가 비행술을 연습하기로 결심한 학생은 건장한 청년 24명"이라고 전한다. 박희성.조종익.정몽룡.홍종만.최능익 등이다. 김종림이 학생수가 15명이라 한 지 약 1개월 만에 24명으로 6월 22일 현재 30명으로 늘었다.
이에 앞서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 3월 1일자는 노백린이 "비행학교는 3.1운동의 연장이며 조종사를 양성해 궁극적으로 대일전쟁에 동원될 수 있다고 털어놨다."면서 "비행학교가 40에이커를 사용할 계획이라는 얘기를 일축하며 3000에이커를 사용해도 되기로 이미 약속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노백린은 같은 인터뷰에서 "중국 여러 곳에 비행학교를 설립할 계획도 이미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이 학교는 6월 22일 첫 비행기를 소유하는데 이날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은 "비행기가 홀스캇(Hall-Scott) 엔진을 장착한 최신형이다. 한국인들은 비행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대로 한국으로 돌아가 여기저기 비행학교를 세울 계획"이라고 전했다.
같은 신문은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보다 훨씬 더 야심적"이라고 평했는데 실제로 이 학교를 추진했던 한인들은 대단히 야심적이었다.
이 학교는 레드우드시티에서 이미 행해지던 중국인들의 대일전쟁을 위한 중국인 비행가 양성에 의해서도 자극을 받았던 것 같은데 당시 재미중국인들은 훈련기 1대를 갖추고 중국인 청년 수십 명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이에 비해 한국인들은 초기부터 훈련기 최소 3대를 갖추고 동시에 교육할 수 있는 훈련생 규모도 100명 정도를 염두에 뒀으며 비행학교가 순항하면 동북아 여러 곳으로도 확산시킬 계획이었던 것 같다.
비행학교는 7월 5일 일반 동포 2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공식 개소식을 거행했고 오림하와 미국인 수석교관 프랭크 브라이언트가 시범비행을 선보였다.
비행학교가 체계화되면서 노백린이 있을 때 함께 구상해 인선까지 마쳤던 '(대한인)비행가양성사'와 '비행가양성소'라는 시스템을 7월 25일 공식화하고 이를 위해 '비행가양성사 장정'을 채택했다. 학교가 자리 잡는 것을 본 노백린은 7월 16일 북미를 떠나 호놀룰루를 거쳐 이듬해초 임정에 도착했다.
이 장정은 비행가양성사의 출범 취지가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비행가를 양성하는데 있음"(1장 2조)이라고 규정했다. 부칙에서는 "본사는 본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비행가양성소를 설립함"(부칙 3조) "비행가양성소는 감독 1인을 두어 관리함"(부칙 4조) "비행가양성소의 감독은 임원부가 선정함"(부칙 5조)이라고 정했다.
편제상 비행가양성사가 비행학교(비행가양성소)의 상급기관이면서 후원기관으로 이에 따라 비행가양성사 초대 총재에 김종림 비행학교 초대 감독에 곽림대가 각각 취임했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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