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신인문학상] 시·시조 부문 가작 "바나나 먹는법" - 부재(不在)
김효남
빈집에 돌아왔다 올망졸망하던 식탁 위에는 꽃진 자리 까맣게 탄 바나나 한 송이 말라가고 있다 오늘은 그의 예기를 들어봐야겠다
2.
시간이 촉박했던 우리는 열대를 동경했어요 열대에선 언제든 꽃을 피울 수 있잖아요 자! 배꼽이 어디일까 하고 생각해보면 알 수 있어요 꽃이 말라 떨어진 자리를 찾아야 해요 아무리 오므려 보고 긴 시간으로 메워봐도 메워지지 않던 자리 오톨도톨한 흉터가 지워지지 않은 자리 눈을 감고 만져 보면 울음소리 촉촉이 들리는 곳 그곳을 찾는 일이에요
엷은 껍질만으로 지낸 뜨거운 날들 쓴 눈물을 흘리지 않고 속에서 삭이는 일이었죠 매끄러운 듯 보이는 몸을 더듬어가면 둥근 세상을 건너온 것 만은 아니에요 몇 번의 고난이 속에서 칼금으로 접혀있어요
조심하세요 아직 눈물이 삭히지 않았을 때 이를테면 푸른 배꼽을 뒤틀어 확인하려 했다간 떫어서 아린 눈물로 울어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인내심 많은 당신 겉으로 흘리지 않고 내내 참아 얇은 뼈 하나 없이 향긋하게 굳은 가슴 한 번 열어 보세요 배꼽 흉터를 떼고 주욱 껍질을 벗겨 한 입 베어 물어요 그리고 하얀 치아로 반짝 웃어봐요
3.
꽃이 피고 질 동안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열대의 겨울이 떠나지 않는다 하지 못한 말들이 이제사 익으며 내용은 굳어버리고 마침표만 까맣게 껍질 위로 번져 나오는 저녁 오늘도 바나나를 먹지 못할 것 같다.
■당선소감 - 김효남 "후회의 단상까지도 앞으로 나가야만 해"
매일 건너는 다리가 막혔다. 낯선 길로 들어선 강변 순환도로 땅거미가 깃들 뿐인데 차들은 바쁘다.
길 위의 시간은 머무르고 싶지 않은 여백의 순간처럼 귀가하는 삶의 속도에 치여 산산히 부서진다. 이제 막 켜지는 가로등의 창백한 시선들이 너무 빨라서 서글픈 속도를 칸칸이 세고 있다.
머리 속의 뿌연 지도가 바람에 척척 접히고 교통표지판의 글씨들이 경적 소리에 놀라 날아간다.
너무 멀리 지나온 것일까? 하는 후회의 단상 까지도 앞으로 나가야만 해 불빛들은 강이 방향을 틀어 쫓아오듯 밀려오고 낯선 곳의 속도는 바람처럼 마음의 가지를 흔들어 여러 갈래의 길 목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여백에는 짧은 안부의 말조차 나누지 않는다.
부족한 글을 선해 주신 중앙일보 제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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