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신인문학상] 시·시조 부문 당선작 "햇빛 여행"
이서현
신문을 보며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하품을 한다 저쪽 벽에 혼자 서 있는 햇빛의 배경 공허한 햇살은 시계를 데리고 시간 여행을 떠난다 그가 가장 아끼는 베란다의 오렌지 나무에 입 맞추고 투명한 시간에게 금화 동전 한 닢을 몰래 건네주었다 그림자는 그것을 검게 받아먹었다 나는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식탁으로 가 앉으며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나 잠시 생각에 잠긴다 식탁 위의 마른 빵 위에 이스트처럼 부풀어 오르는 햇빛 나는 빵을 자른다 수녀원에서 만들었다는 성당에서 사온 딸기잼을 빵에 발라 베어 물며 유리컵에 하얀 부레처럼 동글 부풀어 오르는 우유를 따라 마신다 나는 외출을 한다
햇살은 식탁에 홀로 앉아 한낮의 남은 귤을 더 달콤하게 했다
2.
뭐 대단히 즐거울 것도 없던 하루였지만 다 모인 저녁식사 시간은 즐거웠다 하얀 실내등 불빛 위에는 선명한 빛으로 말들이 구름 위에서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빛은 양배추 냄새가 풍기는 수프 그릇 주위로 모여 앉았다 딸가닥거리는 스푼 소리와 속삭임들이 물 잔과 접시 이곳저곳을 드나들었고 산문을 시집을 읽다 그대로 잠이 드는 내 서재 침대는 고요했다 나의 아침잠을 깨어 놓은 햇빛 커튼 사이로 창문을 열고 나간 햇빛은 바람에 서로 몸 비비고 서 있는 달개비 꽃을 한번 슬쩍 만지고 풀 뜯는 소들의 풀내음을 맡는다 이삭 위에 앉아 있던 햇빛은 새들에 의해 노래 불려지고 까만 씨앗으로 익어 갔다 더 단단해지기 위해 씨앗은 햇빛이 이끄는 데로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바람에 훌훌 실려 가 신석기 시대 씨앗이 희망이었듯이 짐승의 심장이 되고 인간의 숨소리가 된 햇빛 햇빛은 생명들의 흙 속으로 들어가 꿈을 꾸었다 뿌리들의 꿈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러는 사이 꽃대는 키를 높였다 햇살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희망이고 싶었다 시는 내게 언제나 잘 익어가고 있는 열매에 가을 햇살 같은 희망
3.
오늘 아침 산책길에 떨어진 목련꽃 봉우리를 밟아보았다 용서하라 노란 꽃 수술이 총채처럼 모여 앉아 있었다 햇빛의 웅크림을 어젯밤 바람이 마구 흔들어 놓았나 보다 노란 부리 새들이 나뭇잎에 흰 똥을 점점이 뿌려 놓은 메타쉐콰이아 숲을 지나 베란다로 들어 온 햇빛이 찻잔에 소리 없이 챙강챙강 부딪치는 내가 차를 마시는 나무에서 잠이 깬 햇빛이 새들과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햇빛 너는 내가 매일 너처럼 웃는다고 생각하니? 내가 가끔은 얼마나 슬픈지 모르지? 한 번도 그런 생각해 본적 없지? 나한테 정말 진지 해 본 적 없지? 한 번도................... 다람쥐가 풀잎 건드리는 소리에도 귀를 쫑긋이는 작은 짐승 햇빛 넌 몰랐지 그러나 나는 숱한 곳을 다닌 햇빛 너와 내가 결코 가본 적 없는 곳 미래
지금 저 둥지 속의 햇빛
둥근 알처럼 환해온다
■당선소감 - 이서현 "어떤 시를 써야 할까?"
어떤 시를 써야 할까?
요새 적잖이 이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지금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학부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한국에 있다. 방학 땐 미국에서 체류했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서 학교 강의를 듣고 있을 때 지인께서 내 작품을 투고 하셨나보다.
당선 소식을 받고 놀랐다.
심사를 맡아 주신 심사위원분들과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좋은 시를 쓰며 감사함 대신하겠다.
그리고 존경하고 감사하는 분이 계시다.
부족한 내 시에 언제나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그리고 언제나 문학을 사랑하며 사시는 버지니아의 최연홍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지금 포토맥 강가엔 벚꽃이 피었을까? 아 보고 싶다.
■심사평 - 김호길/시인 "천부의 시인을 찾아낸 기쁨"
요즘은 한국시의 르네상스시대라서 한 사람 건너면 시인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왜 한국시의 위기를 얘기해야 하는데 안타까울 때가 있다.
'신춘시' 심사를 하면서 저마다 작품을 보내놓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응모자와 한 생애를 시에 매달려서 번민하는 맑은 영혼을 생각하며 심사자의 공정한 자세를 가다듬곤 한다.
그래서 '신춘시'를 뽑을 때는 그만그만한 가작을 찾는 것이 아니라 번득이는 감각과 뛰어난 상상력을 지닌 시인으로 얼마나 오랜 세월을 혼신의 힘으로 언어를 닦아 왔는지에 초점을 맞추곤 한다.
어쩌다가 한 두 편 기발한 작품을 뽑아낸 시인이 아니라 응모한 모든 작품이 두루 고른 수준의 그 완성도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로 이서현을 찾아낸 것은 심사위원 두 사람의 공통된 기쁨이다. '코뿔소' '천마총 말다래' '오래된 판화' '귀머거리 노인' 등 모두가 그만한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햇빛 여행'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젊은 시인의 예리한 감각이 돋보이고 한 세대를 풍미하는 유행을 따르는 명가의 제자가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와 새 영토를 개척해 나가는 자세를 높이 샀다. "나는 다람쥐가 풀잎을 건드리는 소리에도 귀를 쫑긋이는 작은 짐승"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는 늘 예리한 촉각을 곤두세운 천부의 시인으로 태어날 것으로 짐작된다.
'바나나 먹는 법'의 김효남과 '아버지의 북'의 박선옥도 역시 뛰어난 시인으로 보인다.
바나나를 미각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바나나를 통해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가는 작업을 한 것이 돋보였고 아버지가 치시던 북을 통해 애잔한 진양조 가락을 뽑아내는 새 경지를 펼친 점을 높이 샀다.
북미주 시단에 새 출발을 하는 세 분의 신인에게 축하의 꽃다발을 드린다.
■심사평 - 배정웅/시인·미주시인 발행인겸 편집인 "시적 사유 신선하고 진지"
올해 많은 응모작품 중에서 이서현씨의 '햇빛 여행'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어둠의 여신이 물러간 햇빛이 있는 시간은 사물들이 제자리에서 존재의 본모습으로 되돌아온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의 일상에서 햇빛의 여정을 매우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수사로 그리고 있다.
햇빛이 그 여행을 통해서 짐승의 심장이 되고 인간의 숨소리가 되고 생명들의 흙속으로 들어가 꿈을 꾼다는 시적 상상력은 언뜻 저 인도의 경전 바가바드기타에서의 생명의 순환을 연상케 한다.
흔히 산문시가 빠지기 쉬운 언어와 언어의 이완을 잘 극복하면서 시적 사유가 신선한 느낌을 주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박선옥씨의 '아버지의 북'과 김효남씨의 '바나나 먹는 법' 두 편의 시는 각각 가작으로 선정했다.
'아버지의 북'은 시의 전개 언어의 보법이 매우 경쾌했다. 시 속의 화자는 죽은 아버지를 그리고 있지만 마치 살아있는 아버지를 대하는 듯 시의 정경이 생생하고 절절했다.
"훠이 훠이 한숨자락이 제비되어 몰아가고 시드렁시드렁 박타령까지 불러온다"와 같은 이 시의 서술은 애틋한 부녀간의 정한이 그대로 한편의 서정시를 이루고 있었다.
김효남씨의 '바나나 먹는 법'은 빈집에 돌아와 꽃자리 까맣게 탄 식탁 위의 바나나에서 그의 얘기를 듣는 형식의 시적 전개를 취하고 있다.
바나나에 빗대어 어떤 삶과 운명 같은 것을 넌지시 서술하고 있었다고 할까. 이 시에서 바나나는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삶을 지칭하는 상징 내지 환유적 장치 일수도 있다. 시적 역량이 기대되어 선에 넣었다.
응모작품의 대부분이 신변의 평범한 일들을 주제로 삼고 있었고 시적 진술도 너무 평면적이었다. 이에 비해서 이 세 편의 작품들은 주제며 시적 상상력이 매우 진지했다.
흔히 시는 우수한 벙어리 담화라고도 말을 한다.
벙어리처럼 언어를 절제해야 하는 구조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민 생활의 분망함과 어려움 때문인지 응모작품들이 대체로 감상적인 수준으로 시적 개성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끝으로 최종심에서 논의된 작품은 유인선씨의 시조 '봄날 오후 정거장' 박신아씨의 시 '새벽이 오면' 박금숙씨의 시 '날개' 박현숙씨의 시 '아버지' 최용완씨의 시 '숭례문' 등이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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