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9>
환갑 앞두고 미일 전쟁 나자 방위군 입대
두 아들도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과 싸워
김종림은 1920년초 노백린 임정 군무총장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자 한국독립운동사와 국군사에도 길이 남을 중요한 결정을 한다.
그는 독립군 공군 양성 계획에 흔쾌히 동참하기로 하고 즉시 이를 결행했는데 이 한 해 지원금만 약 5만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당시 달러의 현재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미국학계가 제시하는 환산기준 6가지 가운데 제일 높은 것을 택하면 800만달러 두 번째 높은 기준을 택해도 280만달러가 넘는 거액이다(2008년 기준).
신한민보는 1921년 10월 북가주 순행기에서 "10월 16일 김종림씨 댁에 당도하니 이는 광대하고 청결한 양옥인데 방안제구가 과연 부자의 집이라 할 만하고 또한 말과 뜰이 광활한데 이는 세집이 아니고"라면서 그의 농원에 대해서도 "10월 18일 김종림씨의 농원에 당도하니 망망하고 가히 없는 3300 에이커의 광대한 농원"이라고 썼다.
김종림은 안창호의 주도로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기 위해 세워졌으나 실패한 북미실업주식회사의 폐업 정리를 1929년 김순권 곽림대와 함께 해결했다.
김순권은 재미한인사회가 낳은 불세출의 전쟁영웅이자 위대한 인도주의자인 김영옥 대령의 아버지로서 동지회 주요 회원이었으며 곽림대는 비행학교 감독을 맡은 인물이다.
독립수단으로 군사력을 중시했던 김종림은 1941년 미국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미.일간에 전쟁이 벌어지자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주 방위군이 됐다. 미국 주방위군은 향토방어가 기본이나 일선으로 가기도 한다.
김종림 뿐 아니라 그의 두 아들 모두 미국 해군으로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과 싸웠다. 큰 아들 김진원은 알루샨열도에서 통신부사관으로 복무했고 작은 아들 김두원은 해군 상륙정 승무원으로 필리핀 해역에서 교전을 치른 후 미국이 승리하자 점령군으로 일본에 진주했으니 3부자 모두 군인이 돼 일본과 싸운 셈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만으로도 김종림의 행동을 통한 조국 사랑은 한국이 독립된 후 정부수립 전까지 계속된다.
김종림의 독립운동에서 눈에 띄는 또 한 가지는 당시 재미한인들이 안창호 지지파와 이승만 지지파로 나뉘어 있었다는 통설과 달리 김종림은 편파성 없이 두 지도자 모두를 지지하고 후원했다.
도산 생전에 그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후원자이며 동지였던 김종림은 1946년 동지회 북미총회 제5차 연례 대표회 의장을 맡을 정도로 이승만과도 비슷한 관계였으며 미주한인사회에서 지도자 위치를 유지했다.
1946년 장남의 결혼식 하객이 400명을 넘는 미증유의 대성황을 이루었다는 국민보의 보도 역시 당시 김종림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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