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8>
쌀농사 위해 평양서 볍씨 한가마 공수
3300 에이커 농토 경작 '백미대왕' 별칭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1914년은 김종림의 인생도 바꾸었다. 그가 정확히 언제 농사에 손을 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가 이 해에 농사에 종사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세계대전으로 세계곡물시장의 수급과 가격이 급변하는 격랑을 헤치며 쌀농사를 통해 거부로 떠올랐다.
전쟁으로 유럽이 황폐화되면서 미국이 반사이익을 얻는데 이 기간 캘리포니아에서 발흥한 3대 업종이 벼농사→수수농사→조선업 순이었다.
캘리포니아가 상업용 벼농사를 시작한 때가 1912년이므로 김종림이 이 시점에 캘리포니아에 있으면서 쌀농사에 손을 댄 것은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와 장소에서 행해진 절묘한 선택이었다. 김종림과 가깝게 지냈다는 한 인사는 김종림이 이를 위해 평양에서 볍씨 1가마를 가져왔다고 전했다.
그는 최초의 재미동포 백만장자가 됐는데 순익만 1918년 약 28만달러 1919년 약 52만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돈을 벌 줄도 알았고 쓸 줄도 알았던 김종림은 거부를 쌓으면서 뭉칫돈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비행학교를 위해 일시불로 2만달러를 내고 매달 3000달러씩 지원하기로 했다. 김종림은 레드우드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워 독립전쟁에 참가하려는 한장호의 교육비를 이미 지원해주던 터였다.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이 "김종림이 비행학교 설립을 이끌고 있다."고 보도한 것으로 봐 비행기 3대와 비행장 부지 구입 및 교관채용 등도 모두 김종림의 기부금을 주요 재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림의 농토는 해를 거듭하면서 확장돼 1915년 최소 100 에이커 1916년 최소 280 에이커 1917년 최소 1030 에이커 1918년 최소 1800 에이커 1919년 최소 3300 에이커로 커갔다.
쌀농사로 거부를 축적한 김종림은 '백미대왕'(Rice King)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기부에서도 '큰손'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해 1918년 신한민보 식자기계 구매를 위해 200달러를 기부했을 때 이 신문은 "이러한 연금은 10년 미국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교회 헌금 무연고 동포 병에 걸린 동포를 돕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았고 그해 3월 치과의사의 딸인 최원희(미국이름 앨리스 최)와의 결혼식에 5000 달러라는 거금을 뿌려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러나 김종림의 심장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은 역시 조선의 독립이었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1918년 8월 29일 한일병합 8주년을 맞아 북가주 한인 85명이 김종림의 저택에 모여 넓은 마당에 식당을 준비하고 자동차 12대로 헤드라이트를 밝힌 가운데 망국의 한을 삼키며 독립운동자금을 걷었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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