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5>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 조지 리①
장교 아닌 비행부사관으로 참전
정찰용 비행선 조종 임무도 맡아
이와 관련 로버트 존슨 예비역 미공군중령은 "미군은 1차대전 때에는 비행부사관이 더러 있었으며 2차대전 초까지만 해도 비행부사관이 소수 있다가 2차대전을 거치면서 장교만이 조종사가 됐다"고 확인하고 "조지 리가 그 기간에 156회나 출격했다면 하늘에서 살다시피 해도 모자랄 경이적 기록"이라고 덧붙였다.
장태한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UC Riverside 소수인종학)는 "당시 미국은 극심한 인종차별이 합법적이어서 조지 리가 파일럿임에도 아시아계라서 장교 계급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한민보는 조지 리가 전쟁 중에 독.불국경지대에서 공기선을 탔다고 전하는데 이는 비행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정찰기로 비행선이 사용되곤 했는데 존슨 중령은 "비행선 파일럿이 전투기 파일럿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조지 리의 행적은 더 조사해야 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육군의 징집대상자 등록카드는 조지 리가 키가 작고 땅땅한 체격을 가졌으며 가족관계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미혼이라면서 국적을 일본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조국을 잃고 이민 또는 망명 생활을 하던 한국인들의 비애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조리 리가 비행사가 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 끝에 미군에 입대한 직접적 동기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1차대전이 터지고 미국도 참전하자 당시 미국에 살던 재미동포 청년 다수가 미군에 입대하면서 "전쟁술을 배워 조국의 독립에 기여하겠다."는 얘기들을 많이 했다는 기록으로 미뤄 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지 리가 입대할 무렵 신한민보가 이들 부자의 농토를 60에이커라고 했다가 몇 개월 후에 다시 30에이커라고 한 것이나 아버지 이두형이 1913년 8월 도산 안창호 선생을 자신의 집으로 방문해달라고 초청하면서 "왕복 여비는 못 드려도 편도 여비는 부담하겠으며 오시면 마차로 마중하겠습니다."는 요지의 편지를 띄운 것으로 봐서 이들 부자의 살림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이두형은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서 오랜 기간 적으나마 기부도 계속하고 한글학교에서 봉사도 할 뿐 아니라 1921년 3월 1일에는 혼자 있게 돼 3.1절 기념식을 동포들과 함께 치르지 못하자 "새벽 4시에 혼자 책상에서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만세삼창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이다.
지금까지는 미국 레드우드 비행학교나 윌로우스 비행학교 출신 비행사들이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라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이들이 비행사자격증을 획득한 것은 1920년이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에싱턴(Essington) 비행학교를 나와 미 해군비행사가 된 노정민이 필라델피아에서 시카고까지 비행한 것이 1919년이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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