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4>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 조지 리①
안창남 보다 3년 앞선 1918년 비행
1차 세계대전 156회 출격 전쟁영웅
조지 리는 1896년 인천(당시 제물포) 출신으로 1918년 미군 조종사가 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156회 출격을 기록한 전쟁영웅이다. 그는 6~7세 때인 1903년 3월 30일 아버지 이두형을 따라 세칭 이민선으로 불리는 갤릭 호를 타고 미국으로 갔는데 파일럿으로서 그의 행적은 그가 전쟁영웅으로 금의환향한 소식을 전한 당시 신문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미국 현지신문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Stockton Daily Record)는 1918년 12월 18일자에서 이 청년영웅의 귀향을 '조지 리 명예와 신부를 얻다'라는 제하의 머리기사로 보도하며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 미국의 인종차별을 고려하면 대단히 파격적이며 우호적인 관심이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조지 리는 북가주 맨티카(Manteca)에서 2년 동안 사탕수수 농사를 짓다가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마자 아버지 몰래 미 육군항공대에 자원입대했다. (미국 상선이 독일 잠수함의 무차별 공격을 받자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때는 1917년 4월이었다.)
미군은 처음에는 그의 입대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미군에 들어갔다.
당시 미국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면 원칙적으로 미군에 복무할 수 없었다.
그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San Antonio)에 있는 켈리필드(Kelly Field) 비행장에서 6개월간 비행훈련을 받은 후 사우스캐롤라이너주와 뉴욕주 롱아일랜드(Long Island)에서 계속 훈련받았으며 롱아일랜드에 있는 미첼필드(Mitchell Field) 비행학교를 졸업하면서 정식으로 파일럿이 됐다.
그는 1918년6월 유럽전선으로 보내졌는데 프랑스에 도착한 후 3개월간 다시 훈련을 받은 후 실전에 배치됐고 전쟁이 끝날 때는 이미 156회 무사고 출격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그의 지휘관은 이를 치하해 미 육군항공대의 표식이 새겨진 반지를 수여했다.
이 신문은 조지 리가 북가주 트레이시(Tracy)로 귀향할 당시 21세로 군에서 명예제대를 했으며 전장에서 개선한 후 뉴욕에 사는 한 젊은 여성과 결혼했는데 이들의 사랑은 그가 롱아일랜드에서 비행학교 생도로 있을 때 시작된 것으로 조지 리는 수개월 내에 뉴욕으로 돌아가 가정을 이루고 그의 장인이 경영하는 고무사업을 함께 할 계획이라고 전하고 있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조지 리는 조선에 도움이 되기 위해 전기기계학을 공부할 계획을 갖고 1920년 6월 부인이 기다리고 있던 뉴욕으로 갔으며 부인은 미국여성인데 둘 사이에는 곧 첫 아들이 태어났다.(1919년 6월 7일자 1920년 7월 8일자)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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