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3>
독립운동의 정신적 역할 신한민보
한인 청소년에 비행기 중요성 강조
비행학교 설립에 대한 사전조율 없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노백린을 맞는 성대한 환영식이 열린 날이 1919년 1월15일이고 비행기 3대와 비행장 부지 40에이커 구매 교관과 정비사 채용 학교건물 임대차 계약 학생 15명 모집 등이 모두 그 다음 달인 2월 19일 전에 끝난 것으로 봐서 노백린 장군과 김종림 선생 등의 비행학교 설립은 일사천리로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노백린은 처음부터 군사력을 통한 독립 쟁취를 중시했던 인물로 제1차 세계대전을 지켜보며 공군의 효율성에 주목하다가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이 되자 자신의 지론을 공군 양성으로 정책화하기 시작했다.
노백린은 군무총장 자격으로 이 학교를 만들면서 곧 바로 이동휘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교신을 통해 임정에 보고도 하고 지침도 받으면서 임정의 공식정책으로 추진했다.
공군력을 키워 독립전쟁에 활용하려는 노백린의 전략은 재미동포사회와 맞아떨어졌다.
라이트 형제에 의해 비행기가 발명된 이래 비행 관련 뉴스만 있으면 떠들썩해지는 미국에 살던 한인들은 미국도 결국 참가한 제1차 세계대전을 보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도 군사력 특히 공군력을 한층 높이 평가하던 터였다.
이미 노백린의 미국 본토 방문 전부터 공군력과 독립전쟁이라는 것이 하나의 묶여진 화두로 재미한인사회에 등장했으며 실제로 이미 한인청년 다수가 적극적으로 하늘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재미한인사회는 비행기와 공군력에 대한 이해가 깊었을 뿐 아니라 많은 한인청년들이 조종술을 배우고 있어 사회적 인적 하부구조가 갖춰지고 있던 셈이었다.
이 같은 화두를 반복적으로 던지면서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이끌었던 장본인은 다름 아닌 신한민보였다.
이 무렵 신한민보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면서 특히 한일합방으로 조선의 국권이 침탈되던 1910년에서 한국인에 의한 민족적 언론이 조선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1920년 봄까지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독립운동에 있어서 독보적 무게를 지닌 정신적 지주였다.
발행처인 미국은 물론 멕시코 연해주와 심지어 조선에도 독자를 갖고 영향력을 발휘했다.
신한민보는 "공기선이 향후 정찰기나 폭격기로 크게 활용될 것"이라거나(1909년 3월 10일) 제1차 세계대전을 예고하고 이를 이용해 한민족이 장래를 모색할 것을 권하면서 비행기 사진을 함께 싣는다거나(1914년 1월 29일) '전쟁과학' 난을 만들어 무기로서 비행기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시리즈 기사를 게재하는(1916년 9월8일~10월5일) 등 비행기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신한민보의 캠페인은 실제로 한인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친 듯 한인청년들은 비행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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