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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제2화>-29

바이올린 제작 명장(名匠) 이주호 Meister
“세상은 넓다! 끈기있는 인내라야 한다”

시카고에 학교 설립

“우리가 악기 제작 학교를 세워보는 게 어떻겠나”
Kenneth Warren씨 제의로 커리큘럼 등 준비
‘The Chicago School of Violin Making’ 세워

정경화는 1974년 8월 뿐 아니라 1980년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위해서 시카고에 왔을 때도 반드시 내게 들르곤 했다.

한 번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약속한 협연 날짜보다 먼저 온 일도 있었다. 자신의 바이올린을 미리 내게 점검받기 위해서였다.

시카고에 와서 Kenneth Warren & Son에서 일하면서 5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1975년 어느 초 봄 Kenneth Warren 이 자신의 방으로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악기를 제작해서 판매하다보니 전부터 ‘혹시 시카고에 악기를 만드는 제작 전문학교가 있느냐’는 문의가 아주 많아지고 있네. 미국에 아직 이런 학교가 없는 데 이 참에 이곳에서 한 번 우리가 그런 학교를 세워보는 것이 어떻겠나?” 하고 묻는 것이었다.

지금은 솔트 레이크와 보스턴 등지에도 악기 제작 전문학교가 세워져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같은 학교는 없었다.

이에 나는, “사장님, 저는 이 때까지 악기를 제작하는 일에만 몰두해왔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경영한다는 경영자적 입장에서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아 그 쪽 노하우는 아직 없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학교 경영은 내가 맡을 테니 자네는 독일에서 배운 대로 학사 커리큘럼을 만들고 학장과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면 될 것 같은데….”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라면야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의견일치를 보아 곧 바이올린 제작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그 해 8월 설립된 것이 바로 ‘Kenneth Warren & Son School of Violin Making, INC’였다. 학교 위치는 당시 시카고 다운 타운 Jackson Boulevard의 Kenneth Warren 가게 바로 옆 건물로 정했다.

모든 커리큘럼은 내가 공부하던 독일 Mittenwald 악기제작 전문학교의 것을 그대로 도입했다. 그러나 전문학교니 만큼 학사 일정과 수업과목에 수업시간 등 커리큘럼을 짜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론 뿐 아니라 실습에 필요한 제반 시설을 갖추고 주 정부에 학교 설립 인가를 받으며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데 거의 6개월이 걸렸다. 정말로 힘들었고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1975년 8월 드디어 학교를 세우고 학생모집을 시작해 9명의 신입생을 맞아들였다. 당시 9명 중 우리 동포 학생도 2명 입학했는 데 김성상·임주택씨가 그 들이다. 김성상씨는 현재 서울에서 악기점을 운영하고 있지만 임주택씨는 아깝게도 지병으로 작고했다.

이듬 해에는 16명이 입학했고, 그 다음 해부터는 30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학교도 거의 완전하게 자리가 잡혀 제대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이들을 가르치는 것 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통해서 또한 많은 것들을 깨우치게 됐다. 공자도 논어(論語) 첫 머리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 하지 않았는가. 나 자신 더 배우고 익히는 데 정말 큰 보람과 희열을 느끼게 됐다.

나는 후진들을 양성한다는 보람으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사실 학교의 운영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우선 Kenneth Warren 측에서는 회사와 학교 경영을 병행하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교육사업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하나의 기업을 경영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이것 저것 신경 써야 할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이처럼 심리적인 압박을 받게 되자 1981년 Kenneth Warren 측에서는 학교 경영까지 모두 내게 맡기고자 했다. 나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Kenneth Warren & Son의 경영 실권자로 나섰던 며느리가 더 이상 학교를 경영할 수 없다며 손을 떼버린 지경에 이르렀다.

나 역시 ‘학교 행정과 경영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손을 떼려 하자 이번에는 학생들이 들고 일어섰다. 학생 대표자들이 몇 명 찾아와서는 “학교 운영은 어떻게든 우리들이 해볼 테니 선생님께서는 오로지 가르치시는 데만 힘을 써주십시오. 부탁입니다.”하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처한 지경에 놓였다. 나도 빠진다면 이 학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를 믿고 배우던 학생들의 처지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나도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만은 없게 됐다. 이래서 하는 수 없이 1981년 그 해 내가 명목상으로는 책임을 맡고 나설 수밖에 없게 됐다. 우리는 학교 이름을 ‘The Chicago School of Violin Making, INC’로 개명하고 다시 경영에 들어갔다.

정말로 어려운 시기였다. 학교 운영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우리 속담에 “눈·코 뜰 새가 없다”라는 말이 있는 데 당시 내가 그랬다.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독일 Mittenwald 에서 공부할 때보다 훨씬 힘든 시기였다.

바이올린 제작 전문학교 일로 그 바쁜 와중에도 한 편으로는 ‘시카고 한인 음악인 협회’를 조직하게 됐다. 이 협회를 만들게 된 동기는 당시 한국일보 김용화 지사장으로부터 비롯됐다.

그가 어느 날 내게 찾아 와 “지금 한국은 물론 미국 전 지역 동포 사회에서도 이주호라는 음악적 장인(匠人)이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어요. 그런데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매우 궁금하게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시카고에는 과거 한국에서 이른 바 한가락씩 했던 음악인들이 많이 있지요. 그러니 시카고에서 이 분들에 대한 모임을 만들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제의해온 것이다.

그의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으로 들렸다. 그래서 1875년 8월 경 나와 박정윤·최동수·안소겸(작고)·임주택(작고)·김성상·원영희씨 등을 비롯해 여러 인사들이 모여 이 협회를 시작하게 됐다. 부득이 내가 초대 회장을 맡게 됐다.
이 모임은 음악인들의 친목 뿐 아니라 정기 음악 연주회 개최 등으로 동포들의 정서 생활에도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자부하고 있다. 당시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강신성(비올라)씨나 뉴 올리언즈 심포니의 이휘룡(바이올린)씨 등이 시카고까지 와서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이었다. 김봉현 변호사의 작고하신 형님 김호현(바이올린)씨도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 중 지난 1981년 12월5일 스코키의 센터 이스트 오디토리엄에서 송년 대음악회를 개최한 것은 큰 성과 중 하나일 듯 싶다. 이를 위해 우리는 대규모 오케스트라 단원과 합창단원을 선발했다. 이 날 40여 명으로 조직된 오케스트라는 박정윤씨의 지휘로 로시니의 ‘세빌리아 이발사’ 클루크 아울리스의 ‘이프제니아’ 서곡 등을 힘차게 연주하면서 막을 열었다.

이어 테너 박인수(뉴욕 메트로 오페라 단원), 소프라노 김성자씨의 곡이 이어졌다. 또한 강신성·이희룡·마원기 씨 등에 의한 피아노 삼중주 등이 연말의 겨울밤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 날의 송년 대 음악회는 800여 명이 운집한 동포사회 최대의 성황을 이뤘다.

나는 ‘시카고 한인 음악인협회’의 회장을 3회 연임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시카고에 ‘교회 음악인협회’가 따로 생기면서 ‘시카고 한인 음악인협회’는 점차 위축돼 가기 시작했다. 그 뒤 점차 활동이 줄어들기 시작하다가 없어진 상태가 되고 말았지만 이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계속>

글=이기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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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음악인협 오케스트라

‘시카고 한인 음악인협회’가 1975년 8월 결성된 이후 클래식 음악인들의 정기 연주 모임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1년 10월 24일 ‘시카고 한인 커뮤니티 오케스트라’ 및 ‘성인 합창단’을 조직하기 위한 단원 모집 공고를 냈다.

당시 오케스트라 모집 분야는 바이올린·비올라·첼로·베스·목관·금관·타악기 등이었고 합창단원은 소프라노·앨토·테너·베이스 등 모든 분야였다.

여기에서 합창단원 외에도 40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을 선발해 바로 그 해 연말인 12월 5일 ‘송년 대 음악회’를 개최했다. 당시 이 오케스트라는 아주 순수한 음악 동호인들만의 모임으로 경제적인 문제와 관계없이 정기 연주회를 여는 등 음악인들은 물론 동포들의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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