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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8] '월남서 번 돈 전부 국내로 승금하라'

미 상원 '한국 5년간 5억4600만불 이득'
많은 젊은이 희생됐지만 경제자립 바탕

-듣고만 있는 겁니까?

"전쟁에 승산이 없다는 얘기를 했으니까 심각히 들으면서도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묻지요. 그땐 나도 파병을 하겠다 해서 만나놓고 방법이 뭐냐고 물으니까 대답하기가 참 조심스럽데요. 그래서 총칼로 이길 자신이 없으면 입으로 싸워야 할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외교전을 해야 한다고 그랬지요. 존슨 대통령이 그 얘기도 심각하게 듣습디다. 그런데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닉슨 대통령이 들어와서 키신저를 내세워 모든 걸 입으로 해결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일어날 때 존슨이 날보고 그러시데. 월남전에 대해서 자기한테 그처럼 확실하게 얘기해준 건 당신이 처음이라고 이제는 뭔가 알 것 같다고 말이지. 이건 기록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얘기 아니겠어요?"



-그러면 브라운 각서는 백악관에서 작성된 겁니까?

"아니지요. 한국에 돌아와서 브라운을 불렀어요. 당신네 대통령이 모두 오케이 한 것 들었지 않느냐 들었다 이거요. 그러면서 내가 요구한 대로 하겠다고 그래요. 그러면 각서를 쓰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대사가 각서를 쓰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말이야 하하하. 워싱턴에서 당한 것도 분한데 각서까지 쓰라고 하니까 약이 오른 거지. 그렇지만 나는 웃지. 여보시오 당신은 믿겠지만 후임대사가 와가지고 나는 모르겠다고 하면 그땐 어떻게 하느냐.

우린 생명을 보내놓고 너희는 약속을 안 지키고. 그러면 내가 역사의 죄인이 되는 건 물론이고 우리 장병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각서를 써야 너희 대통령이 약속한 게 남을 것 아니냐. 그래가지고 각서 안 쓰겠다는 걸 그러면 미국에 또 간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브라운 각서'예요.

펜이 잘 나오는데도 안 나온다고 내던지고 말이지 하하하. 결국 대사관으로 돌아가서 메모랜덤(각서)을 가지고 왔는데 아마 대사가 외무장관한테 각서를 써준 것이 한.미외교사에 처음이었을 겁니다."

이 장관은 브라운 대사에 대해 인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했지만 월남파병의 근간은 이런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박 대통령이 존슨 대통령 앞으로 친서를 보내기도 하고 정일권 총리가 러스크 국무장관과 험프리 부통령을 만나 여러 차례 설득한 것도 영향을 미쳤음을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브라운 대사가 직접 이동원 장관 앞으로 공식 문서를 보냈다는 것으로써 이 장관의 집요한 노력이 얻어낸 결과물임은 입증이 되는 셈이다. 브라운 각서의 정식 명칭은 '한국군 월남 증파에 따른 미국의 대한(對韓) 협조에 관한 주한 미 대사 공한(公翰)'으로 규정됐다.

미국이 추가 파병을 조건으로 10개항의 '군수협조'와 6개항의 '경제협조'를 포함 총 16개항을 정리해 1966년 3월 7일자로 보내온 문서는 '대한민국 이동원 외무장관 각하'로 시작되고 있다.

물론 주요 내용 중에는 당시 가장 민감했던 한국 방위 태세의 강화 국군 전반의 실질적 장비 현대화 보충 병력의 확충 증파비 부담 북괴의 남파간첩 봉쇄를 위한 지원과 협조 대한 군사원조 이관 중지 차관 제공 대 월남물자와 용역의 한국 조달 장병의 처우개선 문제 등 9개항이 포함되어 있다.

군수협조 10개항 중에는 대한민국에서 탄약 생산을 증강하기 위해 병기창 확장 시설을 제공한다든가 막사와 독신 장교 숙소 식당 위생 오락 시설 등 부대 복지를 위한 재원 제공도 포함돼 있다.

파월 한국군 전원에 대해 1966년 3월 4일 비치 장군과 김성은 국방장관 간에 합의된 조항에 따라 해외 근무수당을 지급한다는 것도 담겨 있다. 월남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상자에 대해서는 한.미 합동군사위원회에서 합의된 액수의 2배 비율로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것도 들어있다.

한국 정부가 가장 관심을 집중시켰던 경제협조에서는 '파월 대한민국 부대에 소요되는 보급물자와 장비를 대한민국에서 실행할 수 있는 한도까지 대한민국에서 구매하고 파월 미군과 월남군을 위한 물자도 최대한 대한민국에서 발주한다'고 못을 박고 있다.

수송업체와 건설업자들이 새로운 시장을 열게 됐다고 환호했던 부분도 '미합중국 공급업자들과 경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월남공화국에서 농촌건설사업 선무 구호 보급 건설 등의 사업을 위해 한국인 민간기술자 고용을 포함하여 기타 용역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한다'고 분명히 했다.

"생각해 보면 그게 엄청난 금액이고 결과적으로 월남전 파병은 정치.외교적으로 정당성 여부를 떠나 우리 경제성장의 촉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65년부터 72년까지 8년여 동안 많은 젊은이의 희생이 있었고 그분들 덕분에 경제자립의 바탕이 됐다는 것도 사실이고 말이오.

그 전까지 우리 산업이라는 게 뭐가 있었어요? 한국군 장비 현대화도 그때부터 가능해졌지만 군복 신발 캔 음식 막사 건설 이런 산업이 전부 발달하게 된 것 아니오? 우리 경제사적인 면에서 점프하는 디딤돌이 파월인데 조그만 건설회사든 큰 건설회사든 돈은 그 사람들이 다 벌었어요.

한진이 제일 많이 벌었고. 한일회담으로는 포철과 울산공단 같은 기간산업을 일으켰다면 파병을 통해서는 일반산업을 키운 겁니다. 재미있는 비화도 많고 아직도 공개해서는 안 될 얘기가 많지만 우리가 월남에서 번 돈을 월남에서 쓰질 못하게 해서 전부 국내로 송금하도록 했는데 그게 산업의 밑거름이 됐고 그 돈이 정말 큽니다."

실제로 70년 2월 미 상원 사이밍턴 청문회 때 포터 주한 미 대사가 참전에 따른 한국의 경제적 이득을 설명할 때 5년(1965~1969) 동안 5억4600만 달러라 했고 미국 언론은 '한국군 5만 명 파병에 5년간 10억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

이는 브라운 각서에 따른 것'이라면서 마치 미국이 공짜로 거저 준 것처럼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장병들의 희생과 기술자들을 포함한 한국 기업들의 엄청난 수고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 장관도 언급했지만 월남특수를 최대한 경제적 이익으로 연결시킨 대표적인 기업이 한진이었다. 인천에서 수송업으로 시작했던 한진이 급성장한 것은 월남전 덕분이었다.

한진을 통해 월남전이 한국 경제에 어느 정도의 기여를 했는지 조망해 보는 것도 흥미를 끄는 대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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