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따돌리기 vs 따뜻하기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외모가 그저 다르다고 생각했을 뿐 별 다른 기억은 없는데,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이 모두들 그 친구와 거리를 두지 않고 잘 지내었던 것 같다. 그 친구도 성격이 좋아서 뒷자리에서 남자 아이들이 장난을 쳐도 화를 내기 보다는 잘 받아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가 혼혈이었으며, 한국 사회에서 마음 고생을 좀 했을 것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훨씬 후에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쯤이다.
한국에서 혼혈로 태어나 살아가는 것, 구체적으로 말해서 외모와 사고 방식이 남과 다르다는 것은 집단 속에서 많은 고생을 할 수 있음을 의미란다. 다수가 소수의 다름을 그냥 보아주지 않고 궁지에 몰아가는 것, 그 소수들에게 다수와 같아지라고 강요하는 것, 다수가 다수이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느끼는 사고 방식은 삶 속에서 얼마나 우리들을 괴롭히는가?
만약 미국의 학교에서 한국 아이들이 외모와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거나, 교사로부터 골치거리 취급을 받는다면 부모들은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외모와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모든 학교 활동에서 어려움을 겪고,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면 미국의 학교에서 나의 아들은 지금과 같이 공부할 수가 있을까?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에서 마음 졸이면서 학교를 다닐 아들을 상상하면 소름이 돋는다.
미국에서 첫해에 만난 아들의 학급 친구들 중에 덩치 큰 아이 하나가 종종 아들을 괴롭혔는데, 그 때마다 선생님께서 좋은 말로 타이르셨다고 아들은 말했다. 이제 막 미국에 온 친구를 이해하고 도와주어야지 괴롭혀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선생님께서 먼저 아들을 챙기기 시작했단다. 외모도 다르고 아직 영어도 못하는 친구를 선생님은 왜 그렇게 챙기실까?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선생님을 보면서 선생님을 따라했다.
꼭 선생님처럼 아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함께 앉아 공부를 하고 밥을 먹는 친구들 속에서 아들은 점점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게다가 덧셈, 뺄셈 좀 미리 공부시켰더니 학교 수업 시간에 계산을 빨리 했던 아들을 선생님께서는 추켜 세우기까지 하셨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아들은 항상 먼저 문제를 풀고는 다른 아이들의 문제 푸는 것을 도와주곤 했다. 선생님의 지시였다.
어딜 가나 아시아 사람들이 적어서 백인들로부터 눈길을 받아야 했던 그 곳, 앨라배마에서 사는 동안 우리 가족은 늘 이방인의 마음으로 살았었다.
식당엘 가도, 경기장엘 가도 백인들은 우리 가족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길 속에 식사를 하고, 그들의 시선을 뒤로 한채 식당을 나올 때는 항상 우리가 그들 속에 있지 않음을 느껴야 했다.
그런 분위기의 남부 도시에서 일곱살 아들은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가 아들의 학교 생활을 걱정한 것은 단지 아들의 영어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심히 아들을 보살피면서, 다른 아이들을 이끌어서 친구가 되게 하신 선생님의 각별한 노력이 없었다면 아들도 왕따를 경험했을지 모른다.
아이들의 왕따 문제는 선생님들만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 보인다. 전체 사회의 의식과 문화가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다만 교육 현장의 선생님들께서 구체적으로 아이들을 이끌면 더 좋겠다.
성격이 유별나고, 외모가 다르고, 장애가 있거나, 다른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조금 더 신경을 쓰면 어떨까? 왕따로 인해 고생하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마음을 한 번만 헤아려보면 어떨까? 아이들이 다 그렇다는 식으로 잘못을 눈감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 한마디에도 정확한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들이 많으면 좋겠다.
미국에 온 이래로 외모와 문화가 다른 ‘소수’가 되어 살아가면서, 한국 땅의 ‘소수’들이 마음에 떠오른다. ‘왕따’가 ‘왕창 따뜻한 친구되어주기’로 변하는 날은 언제일까?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