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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전 부터 '삐걱'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 어설픈 금융 구제안 내놨다 시장서 혼쭐

"금융위기 대응은 통념을 깨야 한다." 미국 '대부조합(S&L) 사태의 해결사'로 불렸던 로버트 맥티어 댈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1995년 전미은행연합회 연설에서 한 말이다. 한 시대의 생각이나 원칙을 과감하게 깨는 대안을 내놓아야 위기가 진정된다는 얘기다.

맥티어는 통념 깨기를 실천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텍사스 대부조합과 시중은행이 줄줄이 파산한 90년대 주 경계를 뛰어넘는 인수합병(M&A)으로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았다.

당시 그런 합병은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정부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할 경우만 예외였지만 당시 정책감독 담당자 어느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구제안 발표날 뉴욕증시 4.6% 급락

지난 10일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이 내놓은 금융구제안이 시원찮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추가 공적자금을 최대 2조 달러까지 투입해 금융 시스템의 암 덩어리인 부실자산을 처리하겠다는 내용이다. 뉴욕 증권시장이 급락했다. 4.6% 하락이었다. '가이트너 데뷔 주가 -4.6%'라는 촌평이 나올 정도였다. 금융회사 주가 하락은 더 컸다. 이유는 '알맹이가 없다'였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라고 월가 전문가들이 말했다. 그들은 가이트너 대책이 너무나 진부한 것이 시장 실망의 진짜 이유라고 지적했다. 2007년에 위기를 정확하게 예측한 자산운용사 노던트러스트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폴 캐스리얼은 "가이트너 대책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대응처럼 파격적이지 못한 점이 시장의 실망을 더욱 키웠다"고 지적했다.

루스벨트는 33년 3월 4일 취임 다음 날 미국의 모든 은행 문을 닫아버렸다. 한창 진행 중인 예금 인출(뱅크런) 사태에 대한 대응이었다. 직전 월가는 그가 인출 요구보다 더 많은 정부 돈을 투입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후 예금 인출 사태와 은행 파산은 진정됐다.

가이트너는 의회에서도 매운 공격에 시달렸다. 대책 발표 하루 뒤인 11일 상원 금융위원회에 불려나갔다. 의원들은 3시간이 넘도록 부실 대책을 추궁했다. 또 12일 하원 예산위원회에서도 비판과 추궁을 당했다. 그는 "섣불리 대책을 내놓았다가 폐기되는 일이 없도록 신중을 기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변명했다.

"최소 3조 달러 구제책 내놨어야"

전문가들은 가이트너 자신이 말한 대로 "신중함이 병이었다"고 지적했다. 그가 의회와 월가 실력자들의 비판을 받아 대책을 실행해 보지도 못한 사태를 피하려다 보니 대책이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돼버렸다. 그 예로 민관 합동 펀드가 꼽힌다. 이는 민간 자본을 유치해 금융권 부실자산을 사들인다는 안이다.

금융회사에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판국이니 매력적으로 보일 만하다.

그러나 "'위기 와중에 부실자산에 돈을 댈 수 있는 투자자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고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지적했다.

그 결과 가이트너 구제안이 계속 늘어나는 금융권 부실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금융회사 부실이 최대 2조200억 달러에 이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심지어 3조6000억 달러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가이트너는 1조 달러 정도를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가이트너가 내놓은 대책은 최대 2조 달러지만 이 가운데 미 중앙은행이 지원할 1조 달러는 부실자산 처리와는 무관하다.

전문가들은 가이트너가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규모 추가 공적자금 조성을 발표하기를 기대했다. 이 경우 도덕적 해이나 은행 국유화 논란이 벌어졌겠지만 나날이 악화되는 금융 시스템 불안을 해소하는 데는 중대한 전기가 됐을 수 있다.

FT 수석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는 "지금까지 금융구제는 수많은 논란을 낳았다"며 "위기의 순간 금융 시스템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논란을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비판이 쏟아지자 가이트너는 대책 발표 직후 "앞으로 추가 계획을 세워 적극적으로 위기에 대응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이는 지금까지 연방정부와 중앙은행이 보여준 위기 대응 패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재무부는 포괄적인 대응보다 위기가 발생하면 허겁지겁 증상을 완화하는 약을 쓰듯이 대응했다.

"급할 땐 정부 개입" 소신 못 지켜

가이트너의 구제안은 자신의 평소 소신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 시절인 지난해 9월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궁지에 몰리자 정부 돈을 쏟아부어서라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엔 투자은행에 정부 돈을 투입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 당시 재무장관인 헨리 폴슨도 반대했다.

하지만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글로벌 금융 패닉이 발생한 점에 비춰 그의 주장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은 세계 금융시장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각국 정부는 엄청난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전문가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경제팀의 수장인 로런스 서머스 국가경제위원장이 가이트너의 발목을 잡았을 것으로 봤다. 현재 오바마 경제팀은 서머스를 중심으로 가이트너가 금융 구제를 담당하고 크리스티나 로머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이 경기 부양을 맡고 있다. 서머스 1인 체제나 다름없는 셈이다.

런던정경대 드미트리 베이거노스(경제학) 교수는 지난주 더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서머스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 개입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고 믿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통념을 깨는 대책을 마련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서머스는 가이트너의 구제안 이곳저곳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여파로 구제안 발표도 예정보다 하루 늦게 발표됐다고 한다.

문제는 가이트너가 기선을 제압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시장은 그의 대책을 미심쩍어할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위기를 진정시키기가 힘들어졌다는 신호일 수 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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