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추기경 추모글] '바보' 영전에 바칩니다
고재원/남가주 성령쇄신 봉사회장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가장 큰 바보' 예수와 영원히 살러 떠나신 '바보' 추기경님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34년전 이 맘때쯤이었지요. 추기경님이 이사장으로 계셨던 동성고등학교에 배정받아 간 입학식날 막 교문을 들어서니 한 운전자가 차 좀 밀어 달라서 생각없이 그냥 밀었지요. 겉은 멀쩡한 외제 차인데 고장이 났던 겁니다. 알고보니 그 차는 추기경님의 차였습니다. 추기경님은 입학식 미사 때 외제차를 타고 온 것이 미안했는지 변명을 하셨지요.
"어떤 신자가 중고차를 줘서 몇 년 타는데 가다가 자꾸 시동이 꺼져…. 운전기사가 새 차로 바꿔달라 하지만 멀쩡한데 왜 바꿔…."
고급차를 타야 권위도 느껴지고 한국 천주교회의 큰 어른으로서 체면도 서실텐데 추기경님은 낡은 차에 만족해 하셨습니다.
입학식 미사 중 비신자의 손을 들게 해서 세례 받아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으면 전교생이 신자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추기경님을 뵙고 입학식날 개종을 하게 됐습니다. '저 분이 이끄시는 종교라면 믿어도 되겠다'하는 생각이었죠.
남가주 지역 행사에 참석하실 때 마다 연로한 분을 편히 모시고 싶은 저희들 마음을 마다하고 일반석을 원하시던 추기경님. 동창회서 선배이면서 전 이사장이신 추기경님을 위해 저녁 자리를 마련했을 때 호텔에 예약한 것을 알고 '가장 싼 식당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오시겠다'는 말로 주최측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셨던 추기경님.
76년 3.1절 행사 때인가요. 함세웅 신부님 문익환 목사님 등 여러 성직자들이 명동 대성당에서 시국 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을 병환중인 아버님을 위해 기도 드리러 성당에 들렀다가 생생히 봤지요. 그런데 다음날 신문에 국가 전복기도 사건으로 대서특필돼 있었습니다. 전혀 그런 얘기가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며칠 뒤 전국의 거의 모든 사제가 명동 대성당을 가득 채운 가운데 추기경님께서 주례하시던 미사에서 피를 토하시는 것 같이 전해주시던 강론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교회는 교회 본연의 임무만 해야 한다 하시지 교회가 세상에 속해서도 안되지만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 있어야 한다며 무거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 진 추기경님…. 세상 물정도 모르는 진짜 바보이셨습니다.
버려진 고아나 노인들 철거민 등 소외된 이들과 친구하려 애쓰신 추기경님. 그런 궂은 일은 아래 신부님들 시키시고 고관 대작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계셨지만 전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존경하는 김수환 추기경님.
저희들은 세상에서 다시 뵐 수 없는 추기경님을 생각하며 깊은 슬픔에 있지만 유리관에 누워 계신 추기경님의 모습을 보며 손에 꼭 잡으신 묵주를 저희도 항상 잡고 기도하겠습니다.
굳게 다문 추기경님의 입같이 저희도 침묵하며 형제의 허물을 보는 눈을 꼭 감아 조그만 '바보'라도 되어 천국에서 추기경님 꼭 뵐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주님. 추기경님이 가장 낮은 사제로서 저희와 함께 살아 올 수 있도록 허락하셨음을 감사드리며 당신의 사랑을 실천하려 애쓰신 추기경님께 천국의 영복을 허락해 주소서.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