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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셔 플레이스] 추기경의 카리스마

박용필/고문

종교가 세속의 권력과 맞붙으면 어찌 될까. 둘 중의 하나다. 교회가 권력의 칼을 빼앗아 민중에게 되돌려 주거나 아니면 시퍼렇게 날이 선 칼끝을 무디게 만들어 교화시키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예를 봐도 권력에 빌붙을 망정 종교가 지는 법은 거의 없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필리핀이다. 1980년대 중반 마르코스의 부정부패와 독재가 한창이었던 시절 가톨릭 교회가 반정부 투쟁에 앞장 섰다. 한껏 고무된 필리핀 국민들은 맨손으로 권력에 항거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군부의 무자비한 탄압과 살육에 이른바 '피플 파워'(People Power)는 사그라질 위기에 처한 것.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신부들이 차례로 살해당하자 목숨 보전에 급급했다. 주교단 회의를 열어 대책을 숙의했으나 모두 총칼의 위협에 몸을 사릴 뿐이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는 하이메 신 추기경. 처음엔 그 자신도 어쩔줄 몰라 당황했다. 그럴 즈음 전보 한통이 그의 앞으로 배달됐다.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다." 내용은 딱 한 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필리핀 교회에 보낸 메시지였다.

용기를 얻은 신 추기경은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대의 선봉에 섰다. '피플 파워'가 다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강한 카리스마가 끝내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 1987년 '필리핀의 봄'은 이처럼 추기경의 리더십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이뤄낸 혁명이었다.

한국의 민주화 20년 역사에도 고비마다 추기경이 등장한다. 엊그제 87세를 일기로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 그의 이름이 한국 밖에 처음으로 알려진 건 지학순 주교 투옥 때문이다.

국내 언론엔 재갈이 굳게 물려있어 추기경은 외신기자회견을 통해 정부의 조치가 부당함을 조목조목 따졌다. 미국은 동맹관계에 금이 갈 것을 우려했는지 유감 표명으로 얼버무리려 했다.

추기경의 회견에 귀를 기울인 것은 뜻밖에도 유럽 쪽이었다. 서독정부는 당장 석방하지 않으면 경제협력(원조)을 중단하고 국교도 단절하겠다는 초강수의 카드를 뽑아들었다. 프랑스와 이태리 스페인 영국 심지어 북구의 개신교 국가들까지 서독의 조치에 동조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굴복한 박정희 정권은 지 주교를 풀어주게 된다. "주교가 그렇게 높은 지위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보좌관의 답변은 기자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추기경은 훨씬 더 높습니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추기경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존경했다고 한다. 권력의 매서운 칼끝을 무디게 만들었다고 할까.

이젠 '역사'가 된 동아시아 민주화의 두 거목 하이메 신(2005년 타계)과 김수환. 신 추기경이 정권에 맞서 몸으로 일군 필리핀의 민주화는 이후 집권층의 무능과 사회혼란이 겹쳐 나라는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를 실패한 민주화라고 해야 할지.

김 추기경은 그러나 하이메 신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투쟁의 전면에 나서거나 부추기지는 않았지만 필요할 때마다 준엄한 질책과 비판을 쏟아냈다. 암울한 시대에 빛과 소금 그리고 예언자적 사명에 충실해 종교인의 본분을 결코 잃지 않았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 그가 마지막 남겼다는 메시지엔 부당한 권력까지도 용서하고 품어 안으려 했던 추기경의 '바보'같은 삶이 묻어난다. 자신의 아호 '옹기'처럼 세상의 구정물도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덕분에 한국은 민주화와 경제강국이라는 두마리 토끼몰이를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추기경의 '옹기'는 결코 깨지지 않는 시대의 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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