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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아메리칸 드림 이루어지나 오바마의 '5가지 얼굴'

■ 흑인 오바마

그는 유년시절부터 '흑인'이라는 옷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해왔다.

아버지 버락 오바마 1세는 오바마가 2살 되던 해 하버드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떠났고 오바마는 흑인 인구가 거의 없는 인도네시아와 하와이에서 백인 어머니와 조부모 슬하에 자랐다.

어머니가 흑인인권운동에 대한 책을 보여주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보여줬지만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심어줄 커뮤니티가 없었다.



1979년 LA에 있는 옥시덴탈 대학에 입학하면서 오바마는 흑인 커뮤니티를 찾았다. 평범해지기 위해 하와이에서는 '배리'로 불렸던 이름도 본명인 '버락'으로 되돌렸다.

그러나 오바마는 다른 흑인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와는 조금 다른 것을 느꼈다. 흑인들과 백인들의 접점이 어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야말로 둘로 나뉘어진 사회를 이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며 정체성을 찾아 방황했던 나날들이 희망적인 꿈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 신앙인으로서의 오바마

오바마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법대를 마치고 시카고에서 지역운동가로 일하던 때였다. 그의 어머니는 종교가 없었고 외조부모는 기독교인이었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무슬림 논란’의 발단이 된 아버지는 모태신앙이 이슬람이었으나 후에 무신론자가 됐다.

오바마는 진실을 찾으라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 교회를 처음 찾아갔다고 회상했다. 그는 “내 인생의 모든 일은 신앙에 따라 결정된다”며 “내 발을 땅에 붙여두고 내 눈을 가장 높은곳에 둘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종교관을 밝혔다.

■정치인으로서의 오바마

정치인 오바마의 대한 평가는 크게 둘로 갈린다. 대중들은 뛰어난 연설능력과 타고난 카리스마를 높이 사는 한편, 그의 짧은 정치경력을 비판한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오바마는 탁월한 처세술로 극도의 실용주의적인 정치활동을 펼치며 노련한 정치인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정치분석가들은 그가 특정 그룹의 지지를 얻은 뒤 방향을 바꿔 반대 그룹의 후원을 받아내고 결국에는 두 그룹의 다리 역할을 자처하는 방식으로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낸다고 평가한다. 원하는 법안의 통과를 위해서는 초당파적 협력도 불사할 정도.

주상원의원 시절, 모든 경찰심문의 비디오 녹화를 의무화하는 법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오바마는 이례적으로 법에 개입된 모든 이익집단의 동의를 얻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공화당 코커스의 법률자문을 맡았던 피터 배로니는 “오바마는 극히 진보적이고 법률집행과 동떨어진 법안에 대해 경찰을 비롯한 개입된 모두의 지지를 얻어낼 만큼 현실주의자였다”라고 회상했다. 연방상원 레이스를 앞두고 이라크 전쟁을 반대한 2002년 연설에서도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것은 아니다”라며 중도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같은 행보는 그의 대선 캠페인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이라크 주둔미군을 즉각 철군할 것이라고 맹세했던 그가 바그다드에 다녀온 뒤에는 “계획을 수정할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 이밖에 해외정보감시법(FISA), 근해석유시추 등의 사안에 대해서도 개스값 상승등 급변한 상황에 맞춰 기존 입장을 철회했다.

특히 불경기로 인해 경제가 유권자들의 가장 큰 관심을 끌자 최근 “나는 경제성장과 자유시장을 지지한다” 고 밝히며 중도적인 경제자문팀을 구성했다.

개혁적인 이미지로 인기몰이를 한 오바마의 이같은 숨은 노련미는 바로 시카고 남부에서 키운 정치력에서 나온다. 오바마가 정치인생을 시작한 하이드 파크는 시카고대를 중심으로 한 고학력·고소득 인구와 빈민가의 저소득층 흑인으로 이뤄져 유권자 계층이 전국에서 손꼽힐 만큼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인권운동과 대학강의, 흑인 교회를 넘나들며 밑바닥부터 인맥을 구축해 성공을 이룩했던 오바마의 경험은 그가 급속도로 전국적 인지도를 얻고 일약 미국 2대 정당의 첫 흑인 대통령 후보에 이르는데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백인 오바마

주요 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최초의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버락 오바마는 선거운동 초반 흑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의 교육이나 행동, 정서 등이 백인같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60년대 흑인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제시 잭슨 목사 역시 오바마가 제나 6 케이스에 대해 신경쓰지 않자 “그의 행동은 마치 백인 같다” 고 발언했다.

러닝메이트로 선정된 조셉 바이든은 대선 레이스 초기 오바마를 가리켜 “최초로 주류 정치에 나선 깨끗하고 똑똑한, 잘생긴 흑인”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로 오바마는 흑인인만큼 백인이기도 하다. 그는 캔사스 출신의 백인 어머니와 외조부모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냈다. 외할아버지는 진주만 폭격이후 군대에 자원입대해 나라를 지켰으며 할머니는 폭격기 제조공장에서 일했다. 오바마는 “외할머니는 흑인들을 무서워한 적도 있을 만큼 평범한 백인” 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오바마는 또한 지극히 ‘백인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법대를 졸업했다.

심지어 하버드 법률 저널에 흑인 최초로 편집장이 됐을 때도 그는 다른 흑인 동료들을 위원회에 발탁하거나 특별히 우대하지 않았다. 당시 오바마의 당선을 도왔던 한 학생은 “흑인 편집장의 당선이 무의미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동료는 “버락은 모든 상황을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했다”며 특정 인종을 우대하지 않은 만큼 차별도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 가장으로서의 오바마

지난 6월 “너무 많은 흑인 아버지들이 가정을 버린다”라며 날카롭게 비판했던 오바마. 본인 스스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의 가장으로써의 모습은 어떨까.

버락 오바마의 부인 미셸 오바마는 대중들에게 보다 친근한 오바마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그녀가 말하는 오바마는 청중연설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의 오바마가 아닌, 가정적이고 자상하며 때로는 바닥에 양말을 떨어뜨리는 실수도 하는 인간적인 남편 오바마다.

또한 오바마는 일정이 빡빡한 선거운동중에도 두 딸 말리아와 나타샤를 위해 시간을 내며 아빠로서의 역할도 빼먹지 않는다. 주간지 피플에 따르면 오바마는 “딸들에게 헤나 몬태나 티켓을 구해줬더니 꽤 점수를 땄다”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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