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올림픽 D-6] '마지막 봉사' 각오 다졌지만···체력훈련, 죽을 것만 같아요
오성옥 핸드볼은 나의인생<1>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아줌마의 힘’을 보여주며 ‘금보다 값진 은메달’의 주인공이었던 오 선수가 자신의 인생과 핸드볼, 동료들의 모습과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투혼의 과정을 담담하게 펼쳐 보인다.
서울 공릉동 태릉선수촌 내 웨이트 트레이닝장.
'월계관'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체육관에는 '저승사자'들이 득실득실하다. 티셔츠를 뚫고 튀어나올 듯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남자 트레이너들이 가냘픈 여자 선수들을 사정없이 몰아친다. 100kg이 넘는 쇳덩이들과 씨름하다 보면 땀이 비오 듯하고 정신도 멍해진다. 고통을 참다못해 울음을 터뜨리는 선수도 있지만 이 '귀신'들은 인정사정이 없다.
1시간 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 뒤에는 빙상선수들이 하는 점프 훈련을 해야 한다. 우리가 무슨 '트레이닝 종합선물 세트'인가. 50cm 정도 높이의 바를 20회 연속 뛰어넘으면 숨이 턱에 차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게 끝이 아니다. 악명 높은 '불암산 크로스 컨트리'가 마지막 메뉴로 기다리고 있다. 죽을 힘을 다해 뛰어보지만 선두와는 점점 멀어진다. 동갑내기 오영란(36.골키퍼)과 내가 꼴찌로 통과했다. 가쁜 숨을 고른 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면 하루 훈련이 마무리된다.
어제 부친상을 치르고 하루 만에 복귀하신 임영철 감독님이 말씀하신다. "좋은 일이 있으려고 액땜 하는 모양이다. 이제 이래라저래라 주문할 때는 지났다. 각자 할 일을 잘 생각하고 컨디션 조절에 만전을 기하기 바란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이 딱 10일 남았다.
나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끝난 뒤 일본 실업팀으로 복귀해 뛰다 2006년 오스트리아 히포방크 팀으로 이적했다. 집도 차도 받았고 연봉도 꽤 됐다. 한국에 비하면 시시한 수준의 훈련을 하면서도 나는 나이가 많다고 수시로 '열외'를 시켜줬다. 아들 승구(11)도 잘 적응하고 있어서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6월 초 임영철 감독님이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연락을 하셨다. 갈 이유가 없었다. 이미 네 차례 올림픽에서 금.은 메달을 따봤다. 연금도 '만땅'이 돼 더 받을 것도 없다. 다른 종목처럼 메달 땄다고 수천 만원 심지어 억대의 격려금을 주는 것도 아니다.
정말 정말 많이 고민했다. 결론은 '가야 한다'였다. 핸드볼은 내 운명이기 때문이었다. 핸드볼을 했기 때문에 오성옥이라는 이름 석 자가 알려지고 사람들이 나를 높여주는 게 아닌가. 대한민국 핸드볼을 위한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올림픽 5회 연속 출전은 덤으로 얻는 영광이었다.
대표팀에 합류해 운동 강도가 갑자기 높아지면서 발목과 무릎이 아파 왔다. 설상가상으로 2주 전에는 장염에 걸렸다. 설사를 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훈련을 하려니 죽을 것만 같았다. 숙소에 들어와서는 괴롭고 외롭고 아들 생각이 나 계속 울었다.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 짐을 싸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며칠 남았다고 그만두나. 며칠만 더 견디자'. 생각을 바꾸고 다시 이를 악물었다. 하루 쉬면서 링거를 맞은 뒤 다음날부터 훈련에 합류했다.
이번 대회에는 러시아.노르웨이 등이 우승후보로 꼽힌다. 유럽에서는 한국을 강호로 생각지 않는다고 한다. '주전들이 너무 늙었다'는 이유란다. 맞다. 우리는 늙었다. 대표팀 주전 평균나이가 만 34.7세니 말이다. 그래도 너희와 충분히 맞설 만한 체력을 다졌고 기술과 경험은 우리가 한 수 위다. '아줌마의 힘'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걸 베이징에서 보여주고 싶다.
정리=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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