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25시]두 black widow가 말해주는 것
<김현일 중앙일보 논설주간>독자들의 선호하는 본지 칼럼 중의 하나가 '잠망경'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시인인 서량 박사가 '잠망경'의 고정 필자임을 모르는 뉴요커는 거의 없다. 언어학자를 무색케 하는 해박한 어원(語源) 지식과 풍부한 어휘 이를 바탕으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메시지를 전하는 탁월함엔 전문 글쟁이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거기에 프로 뺨치는 섹스폰 실력과 유머 감각 등 '서박사의 키가 1/2피트만 더 컸다면' 정말 볼만했을 게다.
그런 서박사가 어서 짚어 줬으면 하는 대상이 있는데 다른 소재를 다루시느라 아직껏 손을 안댄 말이 있다. black이란 단어다.
얼마전 미전역을 뜨겁게 달군 수퍼볼 양측 사령탑이 모두 Black이고 아카데미상 후보자 전체의 25%가 Black이었다. 흑인이라는 방대한 집단으로 인해 특히 미국에선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black인 것이다.
때문에 이제나 저제나 하며 서박사의 'black 한마당'을 기다렸는데 이번 주 칼럼에서도 지나쳤다. 이런 터에 양헌석 부국장의 칼럼 '아름다운 검은 독거미'가 나왔다. 세계 당구계를 제패한 black widow 자넷 이의 두번째 입양 계획을 전하면서 그녀의 진정한 용기와 인간애 멋을 감동적으로 그린 칼럼이다.
또 이뿐이라면 참고 기다리련만 지난 일요일 또다른 코리안 black widow가 한참동안 TV에 등장했다. 다른 black widow는 각종 먹기대회를 오랜동안 제패한 동포 소냐 토마스(이선경)다. 녹화 필름이 일요일 내내 방영됐었다. 큐 여왕 자넷 이가 유명한 이유와는 달리 '먹기'부문이라 크게 자랑하기는 뭐하지만 45㎏의 작은 몸매 여성이 자신의 세배가 되는 거구의 사내들을 꺽는 장면이 '별미'인 것은 분명하다. 더 이상 black 궁금증을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고금동서를 종횡무진 누비는 서박사께서 재단하면 멋진 'black론'을 맛볼 텐데하는 아쉬움을 씹으면서 사전을 들여다 봤다.
『검은흑인의 더러운 깜깜한 암담한 불길한 성난 흠흉한 불명예스런 부정한』등등 긍정적 의미로 쓰이는 black은 거의 없다. 부정과 경멸의 총화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같은 거짓말(lie)도 black lie가 되면 '악의적인 거짓'이 된다. black을 수식어로 하는 것들중 그저 그런 것은 단순히 색깔을 나타낼 때나 ~diamond(석탄)~gold(석유)처럼 '뒷부분'이 좋아서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고작이다. 또는 같은 패션 브랜드 중에서도 차별화를 노린 프리미엄 블랙 라벨이나 블랙 아멕스 카드에서 처럼 아주 예외적 경우도 있다. 블랙 아멕스는 고급 저택 구입대금까지 결제할 수 있는 등 무제한 사용이 가능한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센추리온 카드의 닉네임으로서 수백만달러의 은행잔고와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만 발급한다.
black관련 단어 풀이의 마지막은 black widow다.
사마귀처럼 교미가 끝나면 곧바로 상대했던 수컷을 먹어 치우는 독거미가 그것이다. 몇몇 서울의 일간신문이 black widow를 '검은 과부'라고 보도했다가 망신을 당한 적도 있는데 수컷이 죽었으니 '과부'라고 해도 별로 틀리지 않을런지 모른다. 과부도 그냥 과부가 된 게 아니라 제가 잡아 먹어 과부가 됐으니 black이란 수식어가 제격일 수도 있고.
어쨌거나 우연인지 그 black widow 별명이 두명의 코리안 여성에게 붙여졌다.
육감적 몸매와 날카로운 눈매 그러면서 세계 당구계를 석권하는 자넷 이에게 얼핏 어울리는 이름같이 들리기도 한다. 자넷 이 본인이 흑거미가 새겨진 장갑까지 끼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먹기 챔피언 이선경은? 아무래도 흑거미와는 거리가 멀다. 이선경의 경우는 소시지를 햄비스킷을 재빨리 입에 밀어 넣는 모습이 그렇게 보인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하기야 영화나 비디오 게임에 등장하는 black widow가 주로 악당이나 잔인한 역인 사실에 미루어 봐도 부정적 의미가 듬뿍 담겨 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러니까 두 코리안 여성에게 따라붙는 black widow가 거슬리지 않을 수 없다. 왜 하필이면 black widow냐 말이다.
2002년 은퇴했다가 4년만에 복귀한 테니스 스타 마르티나 힝기스에게 한 전문지가 붙인 별명이 black widow였다. 그녀와 데이트를 했거나 약혼한 남자(주로 스포츠맨)들이 하나같이 부진한 것을 꼬집는 모양이다. 하지만 두 코리안들은 그런 것들과 무관한데….
별명 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게 우스꽝스러울 지 모른다. 과민일 수도 있다.
그러나 black widow를 어떻게 평가하든 말이 나온 김에 한인들이 다시금 분명히 새겨둘 대목이 있다. 우리를 곱지 않게 바라보는 눈길이 많다는 점이 그것이다. 때문에 자긍심을 살리되 남에게 폐가 되는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언동은 삼가해야 한다. 그들이 타인을 아랑곳 않고 떠드는 등의 민망스런 행태를 일일이 지적은 않지만 잊지 않고 쌓아두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부정의 메아리는 우리와 우리 2세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black widow라는 별명하나도 가볍게 지나치지 못하는 게 안타깝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김현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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