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종욱칼럼)'네 탓‘이 ’내 탓‘으로 바뀌는 시발점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차별화 시키는 여러 가지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내 탓’일까 한다. 가장 큰 예는 세상 죄를 ‘내 탓’으로 자청하고 십자가에서 본을 보이신 예수님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을 통해 수많은 ‘내 탓’들을 고백하고 있다. 성 어거스틴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참회록’을 통해 그가 젊었을 때 지은 죄들을 모두‘내 탓’으로 돌리고 있다. 기도의 핵심이 되는 죄의 고백과 회개는 ‘내 탓’에서 출발한다. 카톨릭교인들은 고해성사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탓이로소이다.”라고 세 번 고백한다. 다시는 이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한국은 몇 년 동안 집 값 폭동 때문에 숨통이 막히고 있다. 특히 서울 강남의 집 값은 하늘을 치솟고 있다. 실수요자 소시민들이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꿈에서조차 힘들게 됐다. 나라 안은 온통 집 값 문제로 흔들어 논 벌집이 됐다. 그래서인지 북한의 핵실험 문제는 처음부터 집값에 밀려 ‘햇볕’을 못보고 있지 않는가? 한국은 어느새 핵 무감각지대가 되어 버리고 만 느낌을 준다.
아무튼 이 집 값 문제로 지난 주 건설교통부 장관, 청와대의 경제보좌관과 홍보수석이 사표를 냈다. 그런데 사표의 변들이 재미있다. 이 중 누구하나도 ‘집값대란’에 대해 ‘내 탓’이요 라고 고백하지 않은 것이다. 모두 입을 모아 ‘네 탓’이 요다. 이 말은 어느 정도 맞다. 이 문제는 노무현 정권 이전부터 있어 온 국가문제였다. 돈 있는 사람들의 ‘집 사 제치기’를 한국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시장자본주의 국가에서 효과적으로 제어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면 왜 너도나도 집에 투자할까? 다른 투자에 비해 이익이 많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노정권은 주택투자를 대치 할 수 있는 숨통을 진작부터 열었어야 했다. 다시 말하면 국정의 우선순위가 잘 못된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네 탓’이 아니라 엄연히 ‘내 탓’이다.
지난 9일 백악관에서 부시대통령이 선거참패직후 첫 기자회견을 가졌다. 민주당의 승리를 축하한다는 말로 회견을 시작한 부시는 곧 이어 “나는 공화당의 패배를 내 책임으로 인정한다. 앞으로 민주당과 함께 협력해서 일하겠다.”라고 말했다. 패배를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으로 받아드리는 지도자 상이다. 그리고 더 나가서 국민의 뜻을 받아드려 국정을 초당적으로 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부시는 하원의장과 상원 원내대표를 맡게 된 민주당 대표를 백악관에서 각각 만나 국정운영방향을 논의했다. 첫 예가 국방장관의 교체였다. 자기임기와 같이 가겠다고 선거직전까지 장담했던 럼즈펠드를 즉각 경질한 이유는 선거패배의 요인이 이라크전쟁에 대한 시민의 불만이었음을 자인한 것.
한국의 집권당인 열린 우리당은 지난 5.31선거에서 참패를 당했다. 이 참패는 작년 각종 재 보선에 이어 40대 0으로 전패를 기록하게 했다. 노무현대통령은 선거직후 청와대에서 있었던 한 모임에서 선거패배에 대해 “한두 번 선거로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 어느 당이 흥하고 망하고 그런 것이 민주주의는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얼듯 듣기에는 옳은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자세히 이 말을 분석해 보면 ‘국정을 하는데 선거결과가 뭐 그리 중요하냐?’하는, 또는 ‘선거에 진 것이 왜 내 탓이냐?’하는 항변처럼 들리기도 한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할 말인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드니 어찌 된 일인가?
그런데 요즘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 열린 우리당의 전 현 고위당직자들, 노무현정부의 전 현직 고위층들이 줄줄이 나름대로의 ‘참회록’을 발표하는 것이다. 김근태 의장, 정동영 전 의장, 천정배 전 원내대표, 김한길 원내대표, 당의장 비서실장 등 당 지도부와 장 차관을 지내다가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다. 이 들은 열린 우리당이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국정을 운영해 왔다고 ‘참회’하고 새 출발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두 말할 것 없이 옳은 얘기다. 그런데 참회하는 말은 있는데 행동은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아프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성 어거스틴처럼 지난 죄에서 참회하고 곧 방향을 돌려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게다. 오만과 자존심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탓이로소이다.’라고 가슴을 치며 ‘참회’ 할 때 거기에는 희망이 있다. ‘네 탓’이 ‘내 탓’으로 바뀌는 시발점이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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