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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주의 신의주 기행 (3)

  신의주 비자 없이는 압록강 못건너
 
 실제 남한이 이룬 경제적인 부는 근면히 노력한 댓가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 부를 누리는 행태에 관하여는 너무나 반성해야 할 부분이 많다. 과거에는 각광받지 못했던 연길이나 용정 등 동북 삼성에 흩어진 조선족 동포들의 적지 않은 숫자가 조국 광복이후 공산주의자들의 중국 평정으로 귀국하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는 형편에 놓인 독립운동에 연루되었던 민족지도자들의 후손이다. 북간도 조선족들을 통하여서 중국 내 소수 민족과 중국 국경을 대치한 변방을 향한 선교의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교회들조차 해외동포들을 대하는 데 있어 조선족들을 차별하고 있지 아니한가?

 가족 생계를 위해 뒷돈을 써가며 찾아온 조국이라는 곳이 아무도 손대려 하지 않는 천한 일을 도맡아 시키면서 임금을 착취하고, 불법체류자 신분을 빌미로 공갈하는 것 또한 한국인의 숨겨진 모습이 아니던가?

 한국인들 앞에 조국통일이 어떤 모습으로 찾아온들 저들에게 북조선 인민들의 생사를 맡길 수 있겠는가?

 나는 정치인이 아니기에 소위 연방제 통일안이나, 점진적 흡수 통일안을 논할 자격이 없지만 오늘날 황금 만능적 우상숭배에 빠진 남한의 오만함이 해독되기 전에는 결코 우리는 해방이니 통일을 논할만한 자격이 없음을 보게 된다.

 비록 지금 일시적인 형편으로 북녘의 동포들에게 경제적 궁핍이 닥쳤다고 해서 비교 우위의 논리로 저들을 대해서는 안 된다. 다른 이의 가난을 죄악시하거나 상대방의 열등이 곧 나의 자존이 될 수 없다.

 북조선에 문화가 없는가? 교육받은 인적자원이 부족한가? 자원 부존으로 따져 남한은 결코 북조선의 자원을 가볍게 볼 수 없지 아니한가? 그들에게는 남쪽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순수함이 있다. 비록 지금은 경제적 궁핍이 있더라도 아쉬움으로 열방의 눈치를 보는 비굴함이 없다. 나는 그들의 자존심 모두를 칭찬하거나 지지하지는 않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 저들 속에 있는 단결과 일체감을 눈여겨본다. 북녘의 형제들을 돌보고 아픈 상처를 싸매 주어야 할 마땅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동북삼성 2백만 조선족도 제대로 대하지 못하는 우리가 무슨 얼굴로 북녘의 이웃들을 껴안고 형제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통일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 요인이 북조선의 정권이니 사상체계니 아무리 떠들어도 실제 저들을 형제요 핏줄을 함께 나눈 민족이라고 하면서 원수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내 자신이 치유 받아야할 더 큰 문제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마치 내부에 더 큰 암세포가 자리잡고 있음을 간과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과 같다.

  신의주 문화소고
 
 내가 미국으로 이민 오기 몇 해전 석별을 아쉬워하던 서화가 몇 분이 합작으로 작품을 만들어 주었다. 월전과 운보, 금추와 남농이 청송과 괴석 등으로 그림을 그리고, 일중이 병제 하였다. 특별한 인연이 많아 젊은 나이에 당대의 대가들을 아버님같이 가까이서 모실 기회가 많았다. 특별히 운보 선생은 외아들 완의 년배가 나와 같았고 미상불 내 집같이 드나들며 나눈 필담이 족히 열 권도 더 넘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작품도 모으며 서화가들과 교류했던 얘깃거리가 책 한 권을 써내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의제선생은 절대로 골동품은 수집하지 말라고 타이르셨다. 골동품을 탐하게 되면 조상 무덤까지 파헤치게 된다는 변이었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내게는 변변한 골동품이 하나도 없다. 다만 생전에 나와함께 교유하며 지낸 서화계의 어른들과의 각별한 인연이 내 정신세계의 설명되어지지 않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특히 신의주와 관련하여 이당 김은호 선생께서 의제와 더불어 북경을 다녀온 후 신의주에 머무르셨던 일화가 생각난다. 이당은 우리나라 북종화의 큰 산맥이요, 그분이 이룬 정상으로부터 월전도 있고 향당도 있고 운보도 있다.

 또한 그분의 제자 가운데 혜촌 김학수는 역사화가로서 독특한 경지를 이룬 분이다. 역사화를 다루다보니 인물화에서 강렬히 요구되는 세필의 정교함과 비벽 같은 오기나 예술적 통찰력이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세칭 이당의 제자들 가운데 화가로서 명성을 꽤나 날리던 사람들은 이분의 작품을 예술적 차원에서 논하는 것을 싫어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분에게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삶의 진한 향기가 있는 분이었다. 부인과 자녀들을 북에 두고 온 그는 교회의 장로로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그리고 강원도 정선에서 발행되는 한강의 상류를 춘하추동 가릴 것 없이 스케치하며 그리기를 마쳐 대하 드라마 같은 ‘한강전도’를 그렸다. 아마 한강전도를 횡으로 진열하면 국립미술관 전관을 채워도 모자랄 것이다.

 나는 혜촌에게 부탁하여 한국기독교 전래 백주년을 기념하는 역사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2년 간의 각고 끝에 그려진 그림이 롯데화랑에서 특별 전시되었을 때 원래 예정했던 열흘 간에서 화랑 측의 요구도 있고 하여 일주일간 전시를 연장하였다. 그만큼 성황이었다. 서영훈 적십자사 총재, 박대선 전 연세대학교 총장, 한경직 목사께서는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서너 번씩 다녀가셨다. 왜냐하면 평안도 출신인 작가와의 교분도 교분이려니와 기독교 역사화 대부분의 주제가 결국 리북의 과거요, 근대의 여명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의 잃어버린 고향을 긴긴 향수로 그려내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화가이기 이전 이분의 삶의 향기를 말하였는데 가족들을 두고 온 아픔이 있어서 그는 부산 피난시절부터 북에서 내려온 고아들을 집에 데려다 손수 키우고 길러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돌보아준 삼십 명에 가까운 어린 고아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요, 가난한 과부의 아픔을 신원하시는 하나님 그 자신이었다.

 이분에게서 길러져 양육 받은 사람들 가운데 미국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한 이승만 목사 형제가 있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의사들과 목회자 신학자들과 국회의원 등 다양한 그분의 자녀들이 어둠 속의 조국을 밝히는 등불이요 소금 노릇을 하고 있다. 기독교 신자였던 이당의 혜촌을 아끼는 마음이 각별하였다.

 그런 이당이 1929년 친구 의제와 더불어 북경을 다녀온 후 그려둔 작품도 팔겸 신의주행 기차를 탔다. 그곳에 신의주경찰서 고등과장이던 김덕기라는 사람과 한번 면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의주역 가까운 곳에 있는 우신려관에 짐을 풀고 김덕기의 주선으로 지방 유지들에게 많은 작품을 팔 수 있었다. 요즈음 말로 스폰서를 잘 만난 것이다. 경찰서 고등과장 정도의 배경이면 그 당시에도 얼마나 좋은 후견인이었을까?

 이당은 전시회를 통해 옆집 사당 채를 사서 화실로 키우려던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유지들의 주문작을 그리기 위해 삼 개월을 더 체류해야만 했다.

 그가 머물고 있던 우신려관의 주인은 신의주 사회에서 이름 날리던 여걸이었고 38세의 완숙미를 자랑하던 전형적 강계미인이었다. 흔히 남남북녀라고 할 때 북녘 미인의 아름다움을 말하는데 북녘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아름다움으로 평양보다 강계를 손꼽는다.

 일주 김진우는 금강산인이라는 별칭이 있다. 나도 일주의 ‘란’을 소품으로 간직하고 있지만 이분의 대나무 그림은 걸작중의 걸작이다. 일주의 제자로 ‘왕죽’을 그리는 옥봉 스님이 남한에서는 시속의 경지를 넘어 유명세를 구가하고 있다.

 일주는 해방이후 자진 월북한 후 소식이 두절되어 있지만 그 잘나가던 일주가 이 려관 주인에게 폭 빠져 몇 년을 동거하였다. 일주의 몸도 마음도 몽땅 뺏어갔던 그 강계미녀의 우신려관에 삼 개월씩이나 머물렀던 이당의 어려움이 어찌했겠는가?

 얼굴도 예쁘고 수단 좋았던 려관 주인은 새벽이면 방에 들어와 이불 속에 손을 넣고 허튼 짓을 하면서 유혹하였다. 반반한 손님이 오면 꾀어 호주머니를 털고 온천으로 유인해 사랑 놀음을 벌렸다. 더욱이 중국요리를 시켜 주연을 베풀고 요리 값과 술상을 손님 숙박비에 얹어 버리는 것이었다. 주문한 그림이 완성되면 빼가기가 일쑤여서 이당의 심적 고통이 여간 많았다.

 이당은 더 이상 당하고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하루는 려관 사환을 시켜 다른 려관으로 옮기겠으니 짐을 꾸려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려관 주인이 버선발로 달려와 손발이 닳도록 빌었다는 것이다.

 이당은 용서를 비는 여주인이 그와 같은 짓을 하지 못하도록 타이르고 다시 주저앉았다. 이당이 그 려관을 떠나올 때 그녀는 중국 안동현에 건너가 소복단장을 한 모습으로 사진을 박아왔다. 이당이 품행이 단정해진 그녀를 위해 초상화를 그려준 것은 물론이고 8폭 병풍까지 해주고 신의주를 떠나왔다.

 삼 개월 동안 신의주에 머무르며 이당은 거금 3천원을 벌었다. 이때 1원으로는 상해에 나가 고급 신사복 한 벌을 맞출 수 있었다. 지난번 신의주 저자거리에 나아가 우신려관을 물으니 신의주 역전은 옛 모습 그대로이건만 강계미인은 찾아볼 수 없어 가슴 한복판이 텅 빈 듯 허전한 마음뿐이었다.

 이당에게 거금 삼천 원을 벌게 해 주었던 신의주는 당시 상해 임정과 봉천의 독립운동가들이 지나는 길목에 앉아 허기진 배를 채우며 목을 축이던 우리 민족사의 샘물이요 뜨거운 여름 시골 옛 마을 어귀에 말없이 서 있는 한 그루 느티나무 같은 곳이었다.

  신의주 가는 길

 지난해 구월 추석날 나는 평양을 떠나 향산을 향하고 있었다. 묘향산은 평안도와 자강도가 만나는 경계의 분수령이 되어 있지만 향산을 가다보면 순안 공항과 숙천을 거쳐 안주에서 큰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서북쪽으로는 정주와 선천을 지나 신의주로 향하는 길이고, 동북쪽으로는 녕변과 구장을 끼고 청천강을 따라 향산 방면으로 나아가는 고속도로가 있다. 평양에서 묘향산까지의 고속도로는 구십육 년에 개통되었고 마주 오는 차들이 드문 드문 한가로운 고속도로를 시속 백 키로 미터로 달리면 한시간 반 안에 도착할 수 있다.

 아침 안개 걷힌 안주 옛 고을을 저 멀리 끼고 돌아 황금빛 찬란한 안주들판을 지나면서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양 마음은 못내 시골 동네 길로 접어든 듯 옛 자연의 향취를 간직한 신의주가는 길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나는 본래 태생이 남한인지라 북에 두고 온 가족이 있을 리 없고, 아무런 인연을 느끼는 곳이 아니련만 코스모스가 만개한 고속도로보다는 시골풍광 가득한 신의주가는 길에 더 애잔한 그리움이 남아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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